이토 히로부미 암살총의 수수께끼, 브로닝총의 장전수를 넘은 탄환은 어디서 발사되었는가
2020-01-17
카테고리:한일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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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당한 이토 히로부미는 한반도를 독립시킨 사람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사살되었습니다.이토(伊藤)는 한국병합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이었습니다.이토는 청일전쟁강화조약(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에서 한반도의 독립을 명기하고 청나라에 이를 약속하게 했습니다.
총리직은 1901년 퇴임.한국통감도 퇴임하고 마지막 직책은 추밀원 의장입니다.공교롭게도 그의 죽음으로 한일 병합론이 우세하여 이듬해인 1910년 8월 29일 병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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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암살과 한일 병합에 반대했던 정치 인생.정한론과 메이지 6년 정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사살되었습니다.이토(伊藤)는 한반도 병합에 대해 시종일관 반대 입장이었습니다.청일전쟁강화조약(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에서 한반도의 독립을 명기하고 청나라에 약속을 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총리직은 1901년 퇴임.한국통감도 1909년 6월 퇴임했고 마지막 직책은 추밀원 의장입니다.의장직이란 명예직이긴 하지만 중립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정치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총리도 아니고 통감도 아닌 의장이 암살된 것입니다 .
암살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명예직이라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는 것 1873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정한론을 저지한 것도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이토(伊藤)는 젊고 32세였습니다.이는 메이지 6년 정변이라고 불리며 천황 폐하의 정한론 폐지 칙명이 내려지게 되어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참의의 절반이 사직하고 군인, 관료 600여 명이 사직하게 됩니다.
여기서 메이지유신의 일등공신이었던 사쓰마번은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불분명한 것은 안중근이 무슨 목적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했는가 하는 것입니다.살해라고 해도 안중근이 가지고 있던 권총 브로닝총 탄환은 이토의 체내에서는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몰랐다고 증언했고 자서전에도 분명히 썼다.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 요직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살해가 일본 정부에 미치는 영향이나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1909년 7월 6일 가쓰라 내각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을 단행할 방침 및 대한시설 대강령'을 각의 결정했습니다.이토 히로부미 암살 전 병합은 결정되었고 , 1901년 이토가 총리대신직을 사임한 것은 한반도의 유화정책을 비판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한반도의 무엇을 바꿨을까요?그는 여순으로 재판을 받았고 암살 이유 진술로 15가지 이유를 열거하고 있습니다.이토와 관련이 있는 항목이나 전혀 관련이 없는 항목도 많이 있습니다.그의 죄명은 살인죄입니다.
안사근이 사용한 브로닝 총은 7발 장전.현장검증에서는 13발의총탄 가 발견되었습니다.
MEMO 이토 히로부미는 한반도 독립론자였습니다.암살당했을 당시의 직책은 추밀원 의장이었습니다.
안중근의 브로닝 총의 수수께끼
안중근이 사용한 권총은 벨기에제 브로닝 총으로 7발 장전입니다.이토(伊藤)가 총에 맞은 것은 3발.그 총알은 브로닝 총이 아니래요.1발은 어깨에서 다리로 관통하여 이토(伊藤)의 위쪽 각도에서 발사된 것입니다.브로닝 총 탄환은 다른 피탄자의 체내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발견된 총알의 수는 총 13발입니다.기병총 탄환도 발견되었습니다.이토(伊藤)는 저격병에 의해 사살된 것입니다.
이토의 얼굴도 모르고 암살?
그렇다면 왜 안중근은 이토를 쏘지 않았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몰랐습니다.증언에서도 분명하며 안중근의 자서전에도 분명하게 적혀 있습니다.그는 그룹에 다가가 이토(伊藤)로 추정되는 남자를 쏘았고 예정대로 체포되어 단독범으로서의 증언을 했습니다.7발 장전 총에서 13발을 발사하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POINT 안중근 단독범으로 사건은 처리되었지만 상황으로 보아 복수의 공범자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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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한계 - 병합 당시 모든 것이 부족했던 한반도.
1805년 조선의 유교학자 정동유(鄭東愈)는 한반도에 없었던 것으로 양, 바퀴, 바늘을 꼽았다.바퀴는 나무를 변형하여 가공하는 기술을 의미하고 바늘은 금속의 정밀 가공을 의미한다.당시 한반도에는 바퀴를 만드는 기술이 없어 짐은 소의 등이나 사람이 어깨나 머리 위에 메고 운반하고 있었다.바늘에 대해서도 금속의 끝을 뾰족하게 하고 뒷부분에는 실을 꿰뚫을 구멍을 만들어야 했으며, 이들은 중국에서 들여왔다.
1894년부터 1897년까지 3년간 4차례 한반도를 여행한 이사벨라바드는 서울로 가는 길은 소가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가늘고 미로 같았다며 식별 가능한 정도의 통로일 뿐이라고 썼다.가로 두 바퀴 이상의 차량이 없었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산업혁명은 큰 기계를 제작하고 대량으로 상품을 제조한다.산업기계를 만들려면 나무 가공기술이나 금속 가공기술은 필수다.그리고 제품을 각 지역으로 운반하기 위한 유통이 필요하다. 원자재나 상품을 운반하는 차, 원래 길이 있어야 한다.작업원에게 작업공정을 전달하거나 제조기록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화폐경제가 없으면 제품을 만들어도 거래도 할 수 없다.당시 한반도에는 산업혁명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없었다.
일본은 한반도에 산업기계, 자동차, 도로, 학교교육 등을 도입했다.신분제도를 철폐하고 노비를 개방하여 유동적인 노동력을 창출하였다.그로 인해 대량생산, 광역유통, 화폐와 상품을 교환하는 화폐경제가 생겨났다.이것이 일본이 한반도에 가져온 산업혁명과 근대화입니다.
이승만과는 도대체 누구인가 - 일본통치시대를 일절 모르는 반일초대대통령 - 3.1독립운동과도 관련없음.
이승만은 친일 개화파?
독립문은 어디로부터 독립했을 때의 것일까
일제강점기를 모르는 이승만
미국 괴뢰정권으로 출범한 반일정부
일본에서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보면 신기한 점이 많다.조사해 보니 서재필의 독립협회 설립 멤버이기도 했던 것 같다.서재필이라고 하면 청일전쟁 이후 서울 독립문을 만든 중심인물이며,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일으킨 즉 친일 개화파이다.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해 후쿠자와 유키치 등과 친분을 쌓았고 상하이에서 민비로 향하던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독립문은 일본으로부터 독립된 문으로 바뀌었을까.독립문은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가 독립한 것을 기뻐하여 서재필 및 독립협회가 설립한 것이지만 지금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문이라고 한국인들은 완강히 믿고 있다.
1897년 고종의 퇴위 요구 전단 살포를 실시하여 투옥되었으며 1904년 출옥 후 1919년까지 미국에서 살았고, 3.1독립운동에도 관여하지 않았다.3.1운동의 기운을 받아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설립했든 파벌항쟁에서 실각한 지 불과 1년 만에 하와이로 이주해 있다.즉 1904년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미국에 살면서, 즉 일본 통치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이승만의 전후 한반도 통치는 바로 미국 시각의 통치였다고 볼 수 있다.그것은 한일 병합부터 한반도의 근대화 등에 대해서는 전혀 빈칸으로 되어 있다.그는 러일전쟁조차도 미국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그의 정책은 GHQ의 정책과 연결되어 있었고 미국 내에서의 반일 감정과도 완전히 연결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어쨌든이승만 시대에 반일 구조의 토대는 구축되었고 현재에 이른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대만과 한국이 정반대인 이유 독립선서 건국 정신에 큰 차이
대만과 한국은 왜 이렇게 다른가
군사정권으로서 시작된 공통점
친일세력이 폭동을 일으킨 대만
대만, 한국은 공통점이 많지만
장제스 8.15 연설
이승만 3.1 임시정부 헌장 선서문
대만과 한국이 너무 다른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 보면 국민성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거기에 답이 있었다고 해도 해결책이 없으니 의미가 없다.
한반도 분할은 따지고 보면 냉전구조 속에서 태어나면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구도가 아니다.군사독재정권과 사회주의의 대립이라는 이상한 구조로 되어 있다.
대만을 둘러봤을 때 어떤가 하면 역시 중국 공산당과 대치한 국민당의 나라이고 일당독재제이며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대만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일제 잔재라 하여 일본에 협력한 인간들을 차례로 숙청, 배제하였다.대만에서는 니니팔 사건이 일어나 친일 세력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곳은 크게 다른 점이지만 이후 국민당 정부는 재발을 우려해 본토 지식인과 공산주의자들을 차례로 숙청했다.숙청이라고 해서 같은 줄 알았는데 친일세력 숙청이라는 게 없었는지 여러 가지 조사를 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한국과 대만은 공통점이 많다.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종전 후 건국도 사회주의와 대치하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한국은 북한과 대치했고 대만은 중국 공산당과 대치하고 있었다.그리고 두 나라 모두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래서 분명히 다른 점으로 장제스의 8월 15일 연설이 있다.이하에 게재합니다.
장제스 8.15 연설
우리 중국(대만) 동포들은 구악을 생각하지 않고 남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우리 민족 전통의 높고 값진 덕성임을 알아야 합니다.우리는 일관되게 일본 인민을 적으로 삼지 않고 오직 일본의 횡포 무도한 무력을 가진 군벌만을 적으로 생각한다고 밝혀왔습니다.오늘 적군은 우리 동맹국들이 공동으로 타도했습니다.그들이 투항 조항을 모두 충실히 실행하도록 우리가 엄격하게 독려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단, 우리는 보복해서는 안 되며, 하물며 무고한 인민에게 오욕을 가해서는 안 됩니다.그들이 스스로의 잘못과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나치 군벌에 의해 우롱당하고 끌려간 것을 우리는 자애롭게 대할 뿐입니다.만약 제멋대로의 적이 행한 폭행에 대해 폭행으로 대답하고, 지금까지의 그들의 우월감에 대해 노예적 굴욕으로 대답한다면, 복수는 원수를 부르고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의 싸움의 목적으로 하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이는 우리 군민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늘날 각별히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다음으로 이승만의 3.1 임시정부 헌장 선서문을 게재한다.
이승만 3.1 임시정부헌장 선 맹세문 존경하고 열애하는 우리 2000만 동포 국민에게 민국 원년 3월 1일 우리 대한민족이 독립을 선언할 때부터 남녀 노소, 모든 계급, 모든 종파는 물론 일치단결하여 동양의 독일인 일본의 비인도적 폭행 아래 지극히 공명하게 지극히 인욕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며 실사와 정의와 인도를 애호하는 국민성을 표현하였으니 지금 세계의 동정이 부연히 우리 국민에게 집중된 것이다.이때에 본 정부가 전국민의 위임을 받아 조직된 것이다.본 정부가 전 국민과 함께 전심하여 육력하고 임시헌법과 국제도리가 명하는 바를 준수하여 국토광복과 국기확국의 대사명을 다할 것을 지렛대로 선서한다. 동포 국민이여, 분발하라.우리가 흘린 피 한 방울이 자손 만대의 자유와 복영의 값이다.하나님 나라 건설의 귀중한 기초인 것이다.우리 인도가 바로 일본의 야만을 교화하는 일 것이다.우리의 정의가 바로 일본의 폭력보다 앞선다.동포여 일어나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자 .
장개석도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나치를 인용하고 있지만 지향하는 길이 전혀 달랐음을 잘 알 수 있다.이것이 양국의 미래를 크게 가른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헌법 전문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으로서 임시정부 선서가 있습니다.거기에는 「우리의 정의가 바로 일본의 폭력보다 앞선다.동포여, 일어나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라."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한일 병합의 진실 - 조선왕조는 자립할 수 없었다 - 청일전쟁부터 한일 병합까지 15년간.
짧은 기간의 역사를 배우면 분명
독립 후 1년도 안 되어 국왕이 도망
고종 환궁을 위해 뿌리 돌리기
대한제국의 건국과 러일전쟁
한국의 주권을 제한
한일병합에
자립심이 결여된 이씨 조선~대한제국
일본이 한반도의 독립을 폭력적으로 빼앗은 것은 아니라는 점은,시모노세키 조약에서 한일 병합까지 단 15년의 역사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일본은 한반도의 독립을 지원하고 결국 그것을 포기했다.이것이 역사의 진실입니다.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4월): 청일전쟁의 강화조약에 의해 한반도는 독립국가가 된다.춘생문 사건(1895년 11월): 친러파 이범진이 총리대신 김홍집 암살을 기도한 사건.노관파천(1896년 2월):춘생문 사건을 거치면서 조선 내 싸움에 신변의 위험을 느껴 국가원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한 사건.독립한지 1년도 안된 시점에 주권을 포기 해버린다.
고무라-베버 협정(1896년 5월) : 일본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조선국의 내정을 감독하고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의 환궁 실현의 조건으로 러일의 군대 주둔 정원 등을 정했다.산현-로바노프 협정(1896년 6월) : 러일간에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것, 조선의 재정개혁을 촉진할 것, 근대적 경찰 및 군대를 조직할 것, 전신선을 유지할 것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대한제국 건국(1897년): 러일 협정을 전제로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다.일본 및 중국과 동격이라는 의미이지만 일본은 이를 승인.러일전쟁 발발(1904년): 한반도내 러시아 이권의 확대는 계속되어 러일전쟁이 발발.
제1차 일한협약(1904년) :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추천인을 한국 정부의 재정·외교 고문으로 임명하게 된다. 제2차 일한협약(1905년) :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을 두는 등 보호국화를 확정한 협약. 헤이그 밀사사건 : (1907년) :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회의에 고종이 밀사를 파견하여 어느 나라 대표도 접견하지 못한 사건.한반도의 일본관할권을 인정받은 회의가 되었다.
한일병합이 각의결정(1909년 7월):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을 단행할 방침 및 대한시설대강"이 가쓰라 내각에서 각의결정.이토 히로부미 암살(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한일병합(1910년 8월): "한국병합 라세키술조약"에 의해 한일병합.
이상의 흐름을 단적으로 파악하면, 일본은 청일전쟁을 치르고 한반도를 독립국가로 만들었습니다.그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친 국가원수를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뿌리 돌리기까지 하여 일본이나 중국과 동등한 제국의 이름을 딴 대한제국의 건국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도 러시아의 남진을 전혀 막지 못하고 조선 내 친러파와 친일파의 대립은 계속됩니다.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은 더 이상 한반도는 자립통치를 할 수 없다고 판단 하며 권한을 제한하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순종은 일진회 등 친일파의 후원을 받아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합니다.
순종황제 칙유와 한일병합의 진실 취미 당구에 흥하고 밤에는 축음기를 듣는 생활
1909년에 들어서자 한일 병합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이완용 총리는 일진회 등 친일파 세력의 뒷받침을 받아 일본 정부와 한국 병합 이야기를 진행하였고 융희 4년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 조약을 조인하였다.
8월 29일 양국 황제의 재가로 조약은 발효되어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본 조선총독부의 통치하에 들어갔다.아래에 게재하고 있는 것은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인 순종황제가 한반도를 향해 발한 칙유로 신문에도 게재된 것이다.
한일병합에 대해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칙유나는 방대한 일을 하여 즉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정령에 노력해 왔으나 아직도 길은 험하고 나라는 약화되고 피폐가 도처에 발생해 망연하다. 이 상황을 수습시킬 수는 없다.오히려 대임을 맡기고 완전한 방법과 혁신적인 공적을 얻어야 한다.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결단하여 한국의 통치권을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우리 국민의 생활과 안전을 확보한다.국민은 국세와 시세를 심찰하고 혼란 없이 대처하며 일본제국 문명의 신정에 복종하고 그 행복을 누리라.나는 결코 국민을 잊은 것이 아니다.국민을 구하고 살리기 위한 진의에서 나온 것이니 이를 잘 이해하라.융희 4년 8월 29일
병합 후 순종(李坧)은 경성부 창덕궁에서 살다가 왕으로 책립되어 이왕으로 칭해졌다.병합 전에는 심신이 쇠약해져 시종에 의지하지 않으면 보행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이 무렵에는 보행이 가능해지면서 쾌활하게 응대하게 되었다.테라우치 마사키는 「국사다난의 심통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고 있다.
이왕은 매우 신경질적이어서 기상 목욕 취침 시간은 스스로 시계를 보고 제시간에 했다.평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취미인 당구에 흥했고 밤에는 축음기를 듣는 생활을 했다.
또 아버지 이태왕이 된 고종만큼이나 기억력이 뛰어나 알현자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제국호텔 초대 주방장을 지낸 요시카와 가네요시 부자의 프랑스 요리를 좋아해 거의 매일 먹고 있었다.
1917년 6월에는 일본을 방문, 10년 전 방한한 다이쇼 천황을 알현하는 형식으로 재회했다.11월에는 창덕궁 대부분이 소손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불에 탄 낙선재라는 건물로 옮겼으나 비좁았다.
이완용은 이태왕이 사는 덕수궁으로 이전하는 것을 생각했으나 이를 들은 이완용은 "천황폐하께서 주신 창덕궁이니 움직이지 않겠다"며 이완용을 질책했고, 이후 2년간 창덕궁 중수가 끝날 때까지 낙선재에서 살았다.
이왕직 사무관 곤도 시로스케는 이왕이 창덕궁의 궁호에 따라 이왕가의 제사가 유지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은 억지로 한일병합을 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순종의 칙유나 이후의 생활이나 언동을 보고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