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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금산의 세계유산 등재 신청에 또 반대하는 한국 일본이 강제노역이 아니라는 근거
2021년 4월 간 내각에서의 각료회의 결정 및 군함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및 이번 사도금산 등재 신청에 있어 당시 징용은 강제노동(forced labor)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견해의 근거를 게시합니다.근거가 되는 1930년의 'Forced Labour Convention'입니다.
군함도 등록시에도 한국은 맹렬히 반대하며 일본이 forced labor 라고 기재한다면 지지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초안까지 제시해오고 있습니다.일본은 이를 거절했고 한일 외무장관 회담에서 최종적으로 한국 측은 forced to work 로 기재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한국 측은 강제노동은 'Forced Labour Convention'에서는 forced labor로 표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기재를 고집한 것입니다. 징용은 forced labor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Article 2-2에 기재되어 있습니다.국가총동원법상 징용은 이 중 (b)에 해당합니다.
한국측은 일본 사도가네산의 세계유산 등재 신청 움직임에 대해 강제노동을 하던 것을 세계유산으로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며 반대하고 있습니다.이것은 군함도 때와 같은 견해를 일본 측은 나타낼 뿐입니다.
C029 - Forced Labour Convention, 1930 (No. 29)
C029-1930년 강제노동협약(No.29)
ARTICLE 1
1. Each Member of the International Labour Organisation which ratifies this Convention undertakes to suppress the use of forced or compulsory labour in all its forms within the shortest possible period.
제1조
1. 이 조약을 비준하는 국제노동기구의 각 회원국은 가능한 한 짧은 기간 내에 모든 형태의 강제노동 또는 강제노동의 사용을 억제할 것을 약속한다.
ARTICLE 2
1. For the purposes of this Convention the term forced or compulsory labour shall mean all work or service which is exacted from any person under the menace of any penalty and for which the said person has not offered himself voluntarily.
2. Nevertheless, for the purposes of this Convention, the term forced or compulsory labour shall not include--
제2조
(1) 이 조약의 적용상 강제노동 또는 강제노동이란 어떠한 벌칙의 위협을 받아 강제되는 동시에 그 자가 자발적으로 신청하지 않은 모든 노동 또는 서비스를 말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의 적용상, 강제노동 또는 강제노동에는, 다음의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a) any work or service exacted in virtue of compulsory military service laws for work of a purely military character;
(a) 순수한 군인적 특성을 가진 업무를 위하여 강제병역법에 따라 규정된 업무 또는 복무
(b) any work or service which forms part of the normal civic obligations of the citizens of a fully self-governing country;
(b) 완전자치국 국민의 정상적인 시민적 의무의 일부를 구성하는 업무 또는 서비스
(c) any work or service exacted from any person as a consequence of a conviction in a court of law, provided that the said work or service is carried out under the supervision and control of a public authority and that the said person is not hired to or placed at the disposal of private individuals, companies or associations;
(c) 법원의 유죄 판결에 의해 해당 업무 또는 서비스가 공공기관의 감독 및 통제 하에 수행되고 해당 개인, 회사 또는 협회에 고용되거나 처분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어떠한 업무 또는 서비스
(d) any work or service exacted in cases of emergency, that is to say, in the event of war or of a calamity or threatened calamity, such as fire, flood, famine, earthquake, violent epidemic or epizootic diseases, invasion by animal, insect or vegetable pests, and in general any circumstance that would endanger the existence or the well-being of the whole or part of the population;
(d) 긴급사태 즉 화재, 홍수, 기근, 지진, 심한 전염병 또는 동물전염병, 동물전염병, 해충의 침입 및 일반적으로 동물의 생존 또는 건강을 위험에 빠뜨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쟁 또는 재해 또는 위협적인 재해가 발생한 경우 엄격하게 규정된 작업 또는 서비스 인구의 전부 또는 일부.
(e) minor communal services of a kind which, being performed by the members of the community in the direct interest of the said community, can therefore be considered as normal civic obligations incumbent upon the members of the community, provided that the members of the community or their direct representatives shall have the right to be consulted in regard to the need for such services.
(e) 해당 공동체의 구성원이 해당 공동체의 직접적인 이익을 위해 실시하는 경미한 공동체 서비스로서, 공동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직접적인 대표자가 협의를 받을 권리를 갖는 것을 조건으로,공동체 구성원에게 부과되는 통상적인 시민적 의무라고 볼 수 있는 것, 그러한 서비스 또는 그에 필요한 서비스.
청나라에서 일어난 일본 유학 붐 근대화의 기회를 잃은 한반도와 혁명정신을 계승하지 못하고 내전에 돌입한 중국
청일전쟁에서 독립국가가 된 조선
중국에서는 일본 유학 붐이
13명을 시작으로 일본 유학 시작
근대화의 기회를 놓친 한반도
청조가 쓰러져도 혁명의 정신은 계승되지 않고
중일전쟁으로 출범한 왕조명 정부
이씨 조선이 중국형 근대화를 지향하는 한편 갑오농민전쟁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승리로 한반도는 독립국가가 되었다 .
일본형 근대화를 요구한 김옥균이 암살된 것은 청일전쟁이 시작되기 4개월여 전이다.
중국에서는 일본 유학 붐이 청일전쟁 이후에 생긴다.유학의 목적은 일본의 근대화와 부국강병 정책을 배우는 것이었다.
광서제하 강유위 등 중국 지식인들이 변법자강 유신운동을 벌였으나 보수세력의 탄장으로 좌절한다.이후 과거제도의 폐지(1905년), 근대학교제도의 창립(1904년), 「교육종지」의 발포(1906년) 및 의무교육의 시행(1907년) 등 당시의 교육개혁은 일본에 모델을 요구한 것이다.
1896년 처음 청조 정부에서 13명의 젊은이가 일본 유학을 파견받아 도쿄고등사범학교 학원에서 3년간 일본어와 화학 물리 수학 등을 공부했다.
신해혁명의 1911년까지 약 2만 명 정도의 유학생이 일본을 방문했다고 한다.
정계 저명인사로는 저우언라이, 이대별, 천독수, 우랑배, 동필무, 장제스, 마중성, 왕조명 등이 있다.손문은 1895년 망명 형식으로 일본에 왔다.문화인으로는 루쉰, 곽말약, 전한, 하향응 등이 있었다.
한반도에서의 근대화 움직임은 사실 중국보다 빨랐다.그러나 그것은 큰 굽히지 않고 옛 정치체제의 이씨조선에 찌그러졌다.아이러니하게도 친중 정책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 중국은 청일전쟁 패배 후 곧바로 일본형 근대화를 위해 정책 전환을 단행한 것이다.
일본에 망명했다가 상하이에서 암살된 김옥균에 대해 한반도의 손문이 돼야 할 인물이었다고 미야자키 다카텐은 표현했다.미야자키는 이누요시 등과 함께 손문의 신해혁명을 뒷받침한 인물이다.조선반도는 자력근대화에 실패한 것이다 .
결과적으로 1911년에 쑨원은 신해혁명에 성공하여 중화민국을 건국하지만, 선통제 퇴위 조건으로 북양군벌 위안스카이를 대총통으로 하는 교환거래를 했기 때문에 청조가 종언하지만 위안스카이가 독재색을 강화하게 되었다.그리고 이를 타도하는 제2혁명에 돌입한다.북벌을 완수하고 장제스가 국민당의 총통이 되고 나서도 서양의 중국 분할은 진행되었다.
손문의 혁명정신이란 일본의 유신에서 배우고 함께 서양과 대치하며 독립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
중국 분할이 진행되는 가운데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혁명정신은 왕조명의 난징 임시정부에 계승된다.손문의 측근이자 일본 유학 경험을 갖고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인물이다.오랜 시간에 걸쳐 중국은 혁명에 실패했다.오히려 국공내전은 계속되고 쑨원의 혁명은 고사하고 전혀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다.
손문이 지향한 일본의 유신이란 근대화뿐만 아니라 아시아 속에서 부국강병을 달성하여 서양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자주독립을 지키는 데 있었다.
유색인종 국가 중 자력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는 일본뿐입니다.아시아 국가들이 근대화를 목표로 일본에서 배운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오사카 USJ나 마루가메 정면을 V자 회복시킨 모리카와 타케시는 오키나와에 다음 기적을 일으킬 것인가?
오키나와는 류큐 왕국으로서 역사적으로 일본이 아니었다.일본어는 세계적으로 독자적인 언어로 불리며 동일 언어체계를 가진 것이 류큐였다.
메이지유신의 일등공신이 된 사쓰마번은 쇄국정책 속에서 대만, 류큐, 그리고 가고시마 앞바다의 낙도를 활용해 많은 물산과 무기를 밀수입하고 있었다.이 유통이 사쓰나가 동맹이 264년간 지속된 에도 막부와 싸우기 위한 무기 공급을 뒷받침하게 된다.
오키나와는 일본에 편입된 뒤에도 여러 지정학적 이유로 문제를 안게 된다.첫 번째는 오키나와 상륙전이다.태평양전쟁에서 일본 본토는 공습에 의한 공격이었지만 유일하게 상륙작전이 벌어진 곳이 오키나와였다.
하늘로부터의 공격도 가혹하기는 하지만 상륙작전이란 미군이 면전에 서서 일본인과 서로 죽이는 현장으로 그것은 전혀 다른 심리적 영향을 미쳤다.
이후 오키나와는 미국령이 돼 일본에 반환된 것은 1972년이며 전쟁이 끝난 지 27년 만이다.오키나와에서는 미국식으로 자동차는 우측통행으로 좌측핸들. 이는 상징적인 예로 여러 규칙이 미국 통치하에 따른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한 달 만에 3,500명 이상의 일본 여성이 미군에 의한 강간 피해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하루에 166명인 셈이다.
메이지유신, 태평양전쟁과 일본의 중요한 전환기에 오키나와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그리고 지금도 오키나와는 미군기지의 최전선에 있습니다.
오키나와(沖観光)는 유수의 관광 자원을 가지고 있어 일본에서는 인기 있는 관광 명소다.다만 국내여행 차원의 이야기다.태평양에 떠 있는 하와이나 안다만해는 태국 푸껫 섬, 인도네시아 발리 섬과 비교하면 어떨까.
오키나와는 수도에서 가장 먼 행정구역이고 경제성장의 혜택도 지정학적으로 마지막이다.관광자원과 오키나와 미군 주둔에 따른 경제에 의존하고 있지만 최저임금에서는 일본에서 최하위다.
매출 부진을 겪고 있던 오사카 USJ를 V자 회복시켜 곤궁한 마루가메 쇼멘을 일대 브랜드로 변모시킨 일본 마케터 모리오카씨가 오키나와에 테마파크를 개설할 것 같다.그것은 2025년 개업 예정이다.
모리오카(森岡) 씨는 오키나와(沖沖縄)의 관광자원은 알려지지 않았다면 없는 것과 같다고 단언한다.오키나와에서 무엇이 출현할지 기대된다.
오키나와는 일본에 편입되어 경제성장의 혜택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최후의 입지입니다.여전히 기지 의존형 경제이기도 합니다.모리오카씨는 다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북방영토에서 공동생활을 한 일본인과 러시아인의 3년간 - 영토반환과 현재의 주민
일본의 영토 문제는 다케시마, 센카쿠 열도, 북방 영토다.이 세 지역은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양국 관계에 있어서나 문제 발생 과정에 있어서나 전혀 다르다.북방영토문제는 간결하게 말하면, 8월 15일에 일본은 항복을 표명했지만, 문서상으로는 9월 2일, 그 후에 소련은 포츠담선언을 추인하지만, 미영중소 이외에 국제적으로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일인 1952년 4월 28일이 된다.그 사이 구소련군은 북방영토를 침공해 병합했다.
소련으로부터 강제송환 명령이 일본인 도민에게 전달된 것이 1948년이니 1945년부터 약 3년간 소련병, 소련이민과 일본인과의 공동생활 기간이 있었다.그 시대 일본인 도민들의 증언을 들으면 매우 흥미롭다.
러시아인들은 몸집이 커서 무서웠다. 집에 흙발로 총을 들고 군인들이 와서 손목시계 손목시계라고 하니까 뭔가 싶어 손목시계를 건네주더니 하라쇼 하라쇼 하고 반갑게 돌아갔다.
러시아인 아이는 귀엽고, 귀엽고, 천사 같았다.저렇게 하얗고 눈이 컸고 고양이처럼 초록색 눈동자는 귀여웠다.서로의 집을 오가며 러일 아이들이 함께 놀고 있었다.이는 옛 도민, 일본인의 증언이다.
현재 1만7000명 정도가 살고 있는 북방영토 반환을 요구하는 일본 국민에게 현재 살고 있는 러시아인을 몰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물은 첫 총리가 아베 신조 전 총리였다고 생각한다.당시 북방영토에 살던 일본인들은 영토 반환을 계속 요구했지만 그곳에 사는 러시아인들은 나가 주거를 빼앗으라고 호소한 적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