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비율이 인구의 40%에 이른 이씨조선 한일 병합은 2,000년 지속된 노비 제도를 폐지했다
2022-05-26
카테고리:이씨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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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지속된 노비제도
한국 학계에서는 이씨 조선시대 인구를 1,000만명 정도로 봤을 때대략 40%에 해당 하는 400만 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695년 서원경(현재의 청주 부근)의 4개 촌락을 조사한 문서에서는 460명의 인구 중 28명이 노비로 삼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비율로는 6% 남짓이 된다.
조선 개국 직전인 1391년 이성계가 받은 봉토에서도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그곳에 사는 162명 중 노비는 약 4.3%인 7명에 불과했다.이것이 100년 후에는 인구의 40%에도 불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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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외발자전거 사진으로 보는 한일병합 전 한반도의 기술력과 지식
바퀴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던 조선
효율이 오르지 않는 운반기술과 유통
조선에는 양과 차와 바늘이 없었다
한반도는 자력 근대화가 불가능했다
일본의 금속 가공,연마 기술은 세계 제일
대머리였던 한반도
이 사진은 옛날 한반도의 재미있는 놀이기구처럼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첫 번째 사진은 무려 한 바퀴의 대차에 사람을 태우고 이동하고 있다.
우스꽝스러움은 차치하고, 이것을 효율성이나 코스트의 시점에서 2번째의 사진과 비교하면 어떨까.두 번째는 일본의 인력거이지만, 어느 쪽도 근대적인 탈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차이점은 한 바퀴냐 두 바퀴냐 하는 것이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바퀴를 만드는 기술이 없어 중국에서 수입하던 .수레바퀴는 값비싼 것이어서 양반이라지만 수레바퀴 하나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그 결과 가장 다른 점은 차를 움직이는 인원이다.한 바퀴의 경우 위에 사람이 타면 불안정해져 앞뒤로 2명 이상이 필요하다.두 바퀴의 경우 안정되기 위해 혼자 운용 가능하다.
바퀴보다 인간의 비용이 훨씬 저렴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아니면 인건비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일까.운반 효율이라는 점에서 생각하면 농사나 물건 운반에 대해서도 모든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 두 배의 인력이 필요하다면 생산효율이 올라갈 리 없다 . 양반조차 한 송이뿐이니 서민들은 바퀴조차 못 썼을 것이다.당시 조선시대를 기록한 서양인의 기록에는 한반도 사람들이 머리 위에 물건을 대량으로 올려놓고 나르고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씨 조선 말기에는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노비였다고 합니다.노비에게 그냥 명령하면 인건비는 들지 않아요.
조선시대 정동요라는 유생(실학자)이 쓴 책 에 따르면 조선에 없는 것으로 이라고 적고 있다.이씨 조선시대 바퀴를 만들기 위한 나무를 구부려 둥글게 가공하는 기술은 없었고 마차, 소달구지, 인력거, 농사용 물레방아가 없었다 .
이걸로 작업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까.바늘이 없다는 것은 금속 가공 기술이 현저히 낮았음을 나타낸다.
바늘을 만들려면 금속을 가늘고 끝을 뾰족하게 만드는 기술이 필요하고 게다가 부러져서는 안 된다.그리고 뒷부분에 실을 통과시킬 수 있는 구멍을 가공할 필요가 있다.이씨 조선시대에 바퀴와 바늘은 중국에서 구했다.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도구가 없으면 만들 수 없다.그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다시 그 도구를 만들기 위한 도구가 필요하다.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가 없어도 한반도는 근대화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수레바퀴조차 만들지 못한다면 산업혁명이 가능할 리 없다.어떻게 증기기관을 이용한 거대한 산업기계를 만들까.
일본의 산업혁명은 1,000년을 넘어 전승된 장인기술을 바탕으로 가능해졌다 .서양에서 배운 생산설비와 철도 등을 가식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일본에서는 특히 현재에도 다양한 세계특허를 갖는 전제기술로서 연마기술이나 금속가공기술이 있다.그 이유는 일본에서는 칼 문화가 오래 지속되어 대장간이 금속을 가공하는 전통 기술을 오래 전승하고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반도는 겨울에는 춥고 따뜻해지기 위해 산에서 나무를 베지만 무작정 베었기 때문에 일본이 왔을 때는 나무도 나지 않은 민둥산뿐이었다.나무가 없는 산에 비가 오면 곧 많은 양의 물이 밀려들어 밭을 침수하고 농작물은 빈번히 괴멸하였다.
일본은 한반도의 산들에 차례차례 식림을 해 나갔다.그 수는 1911년부터 10년간 10억개 에 이른다.이는 산업혁명에서의 기술발전과는 무관한 문제다.이는 노동의 효율화와 계획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씨 조선시대는 국민의 노비화로 인해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아 기술의 전승이나 지식이 끊긴 상태였다.
한일병합으로 일본에 수탈당했다고 한국은 외치지만, 일본이 갔을 때 한반도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부모 중 한 명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되어 노비와 양반 양자의 결혼 자체가 불법이었다. 노비만의 상속이었기 때문에 크게 증가하지는 않았다.
MEMO 일본에서는 율령제도의 종식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시기로서는 10세기 초순입니다.
노비 양산을 요구한 양반
이씨 조선시대에 이르러 고려시대 제도는 점차 느슨해져 양반으로서는 노비끼리 결혼시킬 것이 아니라 노비와 양자를 결혼시키는 것이 노비를 늘릴 수 있다 하여 적극적으로 양자와 노비의 혼인을 권유하였다.양반은 거의 무급의 노비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부를 늘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비는 병역이나 납세의무를 지지 않는 때문에 국가로서는 노비가 늘어난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래서 조선의 일부 왕들은 노비의 수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폈다.
태종은 양인(노비 이외의 계층)의 남성과 여성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두 양인 자격을 부여하도록 했다.당시 양반 중에서는 여성 노비를 첩으로 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는 노비를 줄이고 입양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노비 줄이기 정책에 반대한 양반
노비가 줄자 양반 관료들이 반발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여성 노비들이 멋대로 양인 남성에게 시집가 인륜을 어지럽힌다'는 구실을 앞세워 폐지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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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자 외교 - 밀사는 왜 무시당했지?주권을 포기한 조선을 세계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
러일전쟁 전 대한제국 건국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돕고 결국 외교권을 박탈
헤이그 밀사 사건은 한심한 외교 실패
주요 밀사의 활동
헤이그 밀사사건 이전에 이미 주권포기
러시아 이권의 남하가 러일전쟁의 원인
국가원수가 도망쳐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하는 실수를 벌인 고종은 제1차 러일의정서(고촌 베버협정), 제2차 러일의정서(산현 로바노프협정)가 체결되고 그 전제 아래 경운궁으로 돌아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제국의 이름을 국호에 붙이는 것은 일본 중국과 동격이라는 뜻이었으나 일본은 이를 승인했다.
이후 1904년 시작된 러일전쟁 중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면서 러일전쟁은 일본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러일전쟁이 끝난 뒤인 1905년 체결된 제2차 한일협약에 따라 한반도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러일의정서에 의해 러시아와의 이야기를 붙여 일본은 일본과 동격인 대한제국의 건국을 도왔음에도 고종이 러시아 이권을 끌어들이게 된다.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외교권 회복을 호소하기 위해 고종이 1907년 헤이그 국제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현재 행해지고 있는 고자 외교와 같은 일을 당시에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했을 러시아가 배신하고 참가국 모두에게 거절당했고 고종이 보낸 밀사는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반대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관할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장이 되었다.
[주요 밀사 활동]
회의 의장을 맡고 있는 러시아 제국 주석 대표 네리도프 백작을 방문하지만 면회를 거절당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의 각국 대표를 방문하지만 지원을 거부당한다.
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 외무부 장관에게 면회를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의 회의는 일본의 한반도 관할권을 인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애초 민비암살이나 춘생문 사건을 거쳐 국가원수인 고송이 1896년 하필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망명했다(노관파천).이 시점에서 세계로부터 조선은 자주독립국가로 이미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일본덕분에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조선은 주권을 포기한 것이다 .
망명지에서 원격통치 같은 것을 하려 해도 이미 러시아의 연금 상태여서 차례차례 러시아는 한반도의 이권을 챙기게 됐다.고종이 조선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건국한 후에도 러시아는 한반도 이권을 계속 챙겼고,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러일전쟁이다.
이씨조선은 청나라에 울음을 터뜨려 청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겼고, 로관파천으로 러시아 이권에 침식되어 러일전쟁에 이르게 됩니다.외교권을 박탈당한 것에 불복하여 밀사를 보낸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입니다.그 후 일본은 한반도의 독립을 포기하게 됩니다.
1485년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에서는 부모 한쪽이 노비라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ylow #법으로 명문화 하였다. 조선의 노비 수는 다시 급증하게 된다.
울산부, 단성 등 일부 지역에서는 노비 비율이 인구의 50?60%에 육박했고 1663년에는 한성부 호적에서 73%로 기록됐다.
양반은 사복을 채우기 위해 노비를 양산하고, 나라는 더 이상 노비가 늘어나면 국익으로서의 세수가 줄어드는 줄다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조선 내에서 양반의 세력은 막강하여 국왕이라 할지라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갑오개혁과 한일병합으로 노비제도는 폐지
결과적으로는 1885년 갑오개혁에 따라 명목상 노비제도는 폐지된다.갑오개혁이란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가 독립국이 되기 위해 일본이 요구한 여러 개혁이다.
결국 1910년 한일병합 이후 호적제도 정비와 창씨개명으로 호적상 신분기재를 폐지하고 제도적 노비제도는 종식되게 된다.
일제강점기 근대화로 한반도에 유사 이래 2,000년 계속된 노비제도는 종식되고 40%나 되는 노비가 해방된다.
일본 통치를 도대체 누가 원망했을까
여기서 큰 의문이 생긴다.국민의 절반 가까이는 노비로부터 해방되어 일반인으로서의 권리를 얻게 되어 문화적 생활을 하게 되었다.그 사람들이 일본 통치를 원망할까.「자신이나 가족이나 장래의 자손을, 노비의 인생으로부터 해방시킨 일본을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양반은 분명히 노비를 혹사하여 사복을 채울 권리를 빼앗겼다.그러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그때까지 노비였던 사람들과 같은 계급이 된 것이다.항일운동이란 일본으로부터 권리를 빼앗기고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한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POINT 한반도를 일본은 식민지화했다고 한국은 말하지만, 일본은 40%나 되는 노비를 해방시켰습니다.한반도를 식민지로 한 것은 조선의 특권계급이었던 양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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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노관파천으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다 - 주권을 포기했는데 일본에 빼앗겼다고 한다
독립국이 되었는데 포기한 한반도
국가원수가 타국 공사관으로 도망치다
국제적으로 주권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 한반도
국가원수 망명하면 끝.이것이 국제 상식
고종에게 기회를 준 일본
로관파천은 조선왕조가 주권을 포기한 사건이다.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조선이 독립국가가 된 지 불과 1년 만이다.이범진·이학균 등에 의한 춘생문 사건이 발생.고종을 빼앗아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내통으로 실패하였다.
여기에 미러공사관이 관여한 사실이 뒤늦게 발각되지만 궁녀가 일본이 국왕을 폐위하려 하니 매우 위험하다는 서장을 고종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사실상의 연금 상태가 된다.공사관으로부터의 원격 통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며 대원군파 숙청 등을 지시하고 있다.그 밖에 집정을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기간에 러시아, 미국 등은 한반도 내의 이권을 차례로 챙겨갔다.
조선왕조는 국가원수가 나라에서 도망치는 실수를 벌여 이미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조선왕조는 주권국가가 아니게 된 것으로 국제사회에서는 인지되고 있다.
이후 제1차 러일의정서(小村·ウェーーバーー協定書), 제2차 러일의정서(山縣·로바노프 협정)가 체결되었고, 그 전제에서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제국의 이름을 국호에 붙이는 것은 일본이나 중국과 동격이라는 의미를 포함하지만 일본은 이를 승인하고 있다.
이는 러일전쟁 전날 밤의 사건으로 러시아가 한반도 이권을 챙기는 움직임이 가속화됐다.그리고 가쓰라·태프트 협정은 러일전쟁 후에 대해 미국과의 교통정리를 실시한 것이 된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주장하기 위해 밀사를 보냈고, 회의장에조차 들어가지 못해 국제적으로 부정당한 사건이 된다.
한일병합으로대한제국을일본이강권적으로병합한것처럼한국은말하지만그전에국가로서의체를이루지않았습니다
기억에 새로운 것은 아프가니스탄이다.아슈라프 가니는 대통령으로서 국외로 도피 망명한 셈인데, 어느 나라가 그 후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 정부를 정당한 정부로 인정했을까.
그 순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제압했다.
한반도의 경우 고종이 다시 집정을 하는 것이 허용되어 일제의 보호 아래 대한제국을 건국한 것이다.그리고 역시 국가로서의 체통을 이루지 못하고 한일병합으로 가는 것이다.
이씨 조선시대의 경제 화폐경제 도입한 것은 일본 대한제국 중앙은행은 일본 제일은행
조선반도에서는 화폐경제가 발전하지 않았다
통화를 양산하고 반복되는 인플레이션
화폐경제가 없으면 자본주의는 없다
차관도입과 일본은행이 세관을 주관한다
지난 두 차례 외환위기도 일본이 구제
이씨 조선 초기에는 전매품 소금과 천과 쌀, 잡곡으로 한정된 교환이었다.이후 삼베·면포·쌀 등을 현물 화폐로 거래되었다.1401년 저화를 발행하여 통용을 장려하였으나 보급되지 못하였다.
1423년에는 조선통보라는 동전, 1464년에는 전폐가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국가의 수세에 사용될 목적으로 쓰이지 일반 사회에 유통되는 것이 아니었다.1678년 상평통보를 주조하였다.
이 화폐는 약 2세기에 걸쳐 발행되었지만 각 관청에서 주조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1866년 대원군은 재정 살리기와 경복궁 개축을 위해 당백전을 주조하였다.
재정을 살리기는커녕 양산하는 바람에 화폐 가치는 폭락해 1868년 통용이 금지됐다.1883년에는 당오전을 발행해도 화폐가치는 곧바로 급락해 1895년 통용이 금지됐다.1892년부터 백동화를 발행하였는데, 금본위 체제에서 보조화폐로 사용되었다.
즉 한반도 경제는 물물교환이 기본이다.노비 매매도 노비 5명과 소 1마리와 교환되고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한반도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시켰다.세관은 일본의 제일은행에 귀속되어 관세 징수를 일본 화폐로 실시했다.화폐정리사업의 자금은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으로 이루어졌으며, 일본의 제일은행이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이 되었다.
화폐경제가 없다면 자본주의 경제는 있을 수 없다.한반도의 근대화 및 화폐 경제, 자본의 유통 등 시장 정비를 일본이 실시하였다.지금도 한국이 국외와 거래할 때 외상구매금 신용장은 일본 사은행이 발행하고 있다.이 신용장이 없으면 한국 기업은 국제 거래를 할 수 없다.
1997년, 2008년 한국의 외환위기 때도 일본은 구제에 나섰다.한국 경제의 근간인 통화 자체가 일본이 신용을 주고 있는 것이다.이씨 조선시대처럼 무작정 통화를 발행해 괴멸적인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10년 동안 두 번이나 외환위기를 맞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원화는 여전히 취약하다.이것이 한반도의 현재에 이르는 통화의 역사이다.
미국 윌리엄 그리피스가 쓴 이씨조선 일제강점기 이전의 한반도가 보입니다.
서울로 호송된 네덜란드인 일행은 마치 구경거리의 야수 같았다.하얀 얼굴과 붉은 수염을 가진 이 외국인을 보러 군중이 몰려들었다.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잘 보이는 곳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모두가 네덜란드인이 물건을 마시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서양인들은 술을 마실 때 코를 귀보다 위로 잡아 올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사람에 비유되며 왕은 그 머리, 귀족은 몸통, 인민은 발이다.가슴과 배는 부풀어 오르는 반면 머리와 하지는 말라 있다.귀족은 그 강욕으로 인민의 생혈을 헹굴 뿐만 아니라 왕의 대권도 침범하고 있다. 나라는 충혈을 일으키고 관료주의의 부종을 앓고 있다. .
고문의 풍부함은 조선이 아직도 반문명국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법원과 감옥의 발명품으로는 쇠사슬, 등을 치기 위한 대나무, 엉덩이를 치기 위한 패들 모양의 기구, 살이 터질 때까지 종아리를 치기 위한 채찍, 고기와 내장을 괴롭히기 위한 밧줄, 손으로 쥐어주기, 지팡이, 그리고 무릎과 건넌방망이를 치기 위한 판 등이 있다.
결혼 후에는 여자와의 접촉이 불가능하다.여자는 거의 항상 안방에 틀어박혀 용서를 받지 않고 집 밖을 내다볼 수조차 없다.격리가 너무 엄격해서 외부인의 손가락이 닿았다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딸을, 남편은 아내를 죽이고 아내는 자살할 수 있다 .
조선의 건축은 극히 원시적인 상태에 있다.성곽, 요새, 사찰, 수도원 및 공공건축은 일본이나 중국의 장려함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이 나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데 석조 유적이 거의 없다.주거지는 기와집이나 초가집으로 거의 예외 없이 단층집이다.소도시에서는 규칙적인 대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곳곳에 산재해 있다.대도시나 수도에서도 거리는 좁고 구불구불하다.
조선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문맹이다.아마 농민 계급의 남자 열 명 중 네 명이 중국어나 조선어를 읽을 수 있겠지만 여자도 계산에 넣으면 약 85%의 사람들은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다만 지역차는 크다.
조선에는 사무라이가 없다.일본에서 조선에 부족한 것은 심신이 잘 단련되고 병사인 동시에 학자이며 충성심과 애국심과 자기희생의 높은 이상을 내세우는 문화적 집단이다.
당시 한반도를 전한 저서는 여러 편이지만 내용은 공통적으로 양반의 횡포, 관료부패, 문화가 미개함을 전하고 있습니다.한국에서 전해지는 이씨조선만이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북방민족의 침략을 계속 받은 중국과 반도의 역사. 반도는 끝내 독립을 유지하지 못했다
한반도는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중국 대륙이 쏙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입니다.그래서 중국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심은 도대체 무엇일까요?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에 대한 역사적인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인 이유가 커 보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인 대륙에서의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봅시다.한반도에는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고고학상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진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으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전설상의 기자조선은 중국의 은나라 기자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위씨 조선은 중국 연나라의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습니다.포인트는 전설상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중국의 속국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후에도 중국의 침공을 계속 받는 조선.이후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고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고구려가 승리한 후 수나라, 그 후에는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게 됩니다.이후 반도에서는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지만 건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대륙 당나라의 책봉하에 놓이게 됩니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서 역시 속국이 됩니다.
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번의 일본 침공을 실시하여 실패했습니다.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은 만주지역에 있던 민족이었고,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나라 왕조를 열었습니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보면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자리잡았습니다.북방민족의 대부분은 유목민족으로서 생활을 주로 했지만,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인 관계상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匈놈,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에게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역사상의 대부분을 한민족이 아닌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습니다.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설명한 것을 볼 수는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계속 받아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입니다.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도 당나라도 원나라도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봤을 때도 이민족 국가입니다.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대륙 지배를 거쳐 그 이민족에 의한 중국대륙의 왕조가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한반도가 주변 이민족에게 침략당한 횟수는 크고 작은 것을 포함하여 무려 960회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일합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이라는 주변 이민족 국가의 지배를 받은 것이 됩니다.한반도에 있어서 자신들은 중국 대륙과 연결된 존재이며, 작은 중국, 소중화를 자칭하고, 일본은 그 바깥의 나라라는 감각이며, 그 중국을 중심으로 한 우월의식이 역사적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즉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에 의한 국가건설, 독립국가로서의 개념을 유사 이래 가져오지 않았다.가질 기회도 의사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이 한반도를 독립국가로 삼은 후에도 그 의식은 싹트지 못하고 자력국가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러시아에 이권을 차례로 팔아갔습니다.그리고 보다 못한 일본은 한반도의 자주독립 지원을 포기하고 1910년 한일합방을 실시합니다.한국은 한반도의 독립을 일본이 빼앗았다고 하는데, 한반도가 독립국가가 된 것은 청일전쟁의 시모노세키 조약, 즉 일본에 의한 것입니다.그 뒤에 자립독립 의식을 제대로 가져준다면 병합할 필요도 없었다.라는 것이 일본의 본심이겠지요.
한국은 원래 독립국이 아니다 1000년 속국이었던 조선을 독립시킨 것은 일본이다
일본이 한반도의 독립을 빼앗았다는데 정말 그럴까.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한반도를 독립시킴과 동시에 실질적인 보호국으로 삼았다.이것을 일본 식민지화의 첫걸음이라고 한국에서는 말하는 것 같지만 보호국화한 이유는 간단했고 조선반도는 군사방위, 행정기구, 조세관리 등 전혀 국가로서의 몸을 이루지 못했고 일단 독립을 시켰다고 해도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
일본이 한반도의 다양한 개혁을 통해 실질적으로 독립국으로 만드는 목표는 고송의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국가원수가 도망간 사건)으로 좌절된다.고종은 러시아의 연금 상태가 되면서 원격적으로 한반도 이권이 러시아에 차례로 넘어가게 된다.러시아의 권익이 확대되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는 한반도 유화정책이 원인이라는 책임을 물어 1901년 총리대신직을 사임하게 된다.
고종이 귀환한 뒤에도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멈추지 않고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만주에 러시아가 주둔한 뒤 러일전쟁으로 발전한다.일본은 한반도의 외교권을 박탈한다(제2차 한일협약). 러일전쟁 이후에도 고종은 러시아와 연결되어 나라를 파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으로 일본이나 청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결국 일본은 한반도 독립을 완전히 포기하고 한일 병합으로 향하게 된다.
당시의 조선반도는 일본의 보호 아래 최초로 독립국 상태였던 .한반도 정부는 실질적인 독립을 위한 노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러시아에 접근했다.러시아의 이권 요구는 거세지기만 했고 양자택일론처럼 일본과 병합조약을 맺었다.
즉 한국이 현재도 말하는 일본이 나라를 빼앗았다는 것은 옳은 표현이 아니며 조선은 독립국이 아니었다.청 왕조가 일본에 한반도를 빼앗겼다고 한다면 이해가 된다.그런 곳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