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암살 범인은 누구야?한국의 주장은 사뭇 다르다.일본인 중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2022-01-17
카테고리:이씨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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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의 남편 고종은 암살범을 알고 있었다
고종은 1906년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알현하면서 #ylow #내 부하 중 범인이 있었다 #/ylow #라고 말했고,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민비 암살사건 혐의로 특사된 조희연 우범선 이두황 이범호 권희진 등 6명에 대해 왕비를 살해한 장본인이라며 처형을 칙명했다.
아들 순종은 암살범 목격
살해 현장에 있던 순종은 우범선이 국모의 원수임을 목격했다고 보고했고, 또 우범선 자신도 자신이 민비를 살해했다고 자백 #/ylow #한 바 있다.
우범선은 순종이 쏜 것으로 알려진 자객 고영근과 노윤명에 의해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1903년(메이지 36년) 11월 24일 암살된다.
지위를 박탈하고 평민으로 처리
조선에서는 민비 암살 이틀 뒤(10월 10일) 민비의 사망이 일반에 공표되기 전에 대원군이 민비 왕후의 지위를 박탈하고 평민에게 떨어뜨리는 조칙이 공포된다.이때 민비의 사망은 아직 공표되지 않았다.
즉, 국내적으로는 평민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정부는 조선 국내에서 행한 재판에서 흥선대원군의 주모로 하는 판결 를 내렸다.
MEMO 사건은 대원군이 주모한 암살사건으로 처리되었습니다.그리고 민비는 평민으로서 사망을 공표당합니다.
아울러 읽고 싶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을 덮고, 역대 조선왕조는 속국화 - 대륙반도에서 본 일본의 위상이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
건국부터 중국의 속국
이후에도 계속 중국의 침공을 받는 조선
이민족 지배를 받아온 중국과 조선
북방민족에서 역사를 보다
일본통치만을 규탄하는 한국
한반도는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 대륙이 완전히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 로 되어 있어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지만 그뿐만이 아니다.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보고 싶다.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고고학상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부터라고 한다.
전설상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며 위씨조선도 중국 연나라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는 .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는다.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되 건국 직후 후당의 책봉하에 놓이게 된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된다.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이란 만주 지역에 있던 민족으로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 왕조를 연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볼 때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인지되었고, 그 민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 관계상 정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의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역사상 대부분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다.
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나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고 지배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위의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나 당나라나 원나라나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볼 때도 이민족 국가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소규모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 대륙 지배를 거쳐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흐름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중국의 주변 민족 속으로 분류되는 .지리적으로 표현하면 북이에 대해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동이라고 불린다.중국, 한반도에 공통된 주변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병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과도 공통되는 이민족 국가에 지배된 셈이다.그것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동안 1000년 넘게 중국에 지배돼 온 것에는 불평하지 않고 일본의 35년만 1000년을 원망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똑같이 피지배지역의 역사였다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지금도 중국 한반도의 공통적인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피해자 의식은 역사적으로 배양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본을 더 끌어보면 중국 대륙도 침략받아 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의연하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무근거 역사인식
한국인들이 믿고 있는 일본인이 민비 암살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왕비를 끌어내 두세 곳에 베인 상처를 입히고 나체로 웃으며 또 화를 내면서 왕비의 국부를 꼼꼼히 검사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민비를 살해했다는 얘기다.
참고로 그 근거가 되는 자료의 제시는 평소와 같이 없다.위안부의 이야기나 군함도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선정적인 이야기로 바꾸어 상대방이 충격을 받는 동안 근거 없는 이야기로 바꾸어 결론짓는다.
남편 고종의 부하가 아들 순종이나 여러 인간 앞에서 이런 짓을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많은 궁녀 중 유일하게 살해된 민비
민비암살 시 궁중에는 100명 정도의 궁녀, 하녀가 있었고 민비 1명만이 살해되었다. 민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누구 하나 틀리지 않고 민비를 암살하고 있는 것이다.
민비와 접견할 수 있는 인간은 한정된다.게다가 암살을 마치고 범인들은 곧바로 도망치고 있다.국부에 기름을 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몇 안 되는 민비의 얼굴을 아는 인간
참고로 현재 민비로 추정되는 사진은 민비가 아니라는 학설은 1910년까지의 일본이나 유럽 자료에서는 정장 한국의 부인 궁중의 시녀 궁녀로 소개된 것으로 이 사진을 민비이라고 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밝히고 있다.그렇게 민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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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자 외교 - 밀사는 왜 무시당했지?주권을 포기한 조선을 세계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
러일전쟁 전 대한제국 건국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돕고 결국 외교권을 박탈
헤이그 밀사 사건은 한심한 외교 실패
주요 밀사의 활동
헤이그 밀사사건 이전에 이미 주권포기
러시아 이권의 남하가 러일전쟁의 원인
국가원수가 도망쳐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하는 실수를 벌인 고종은 제1차 러일의정서(고촌 베버협정), 제2차 러일의정서(산현 로바노프협정)가 체결되고 그 전제 아래 경운궁으로 돌아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제국의 이름을 국호에 붙이는 것은 일본 중국과 동격이라는 뜻이었으나 일본은 이를 승인했다.
이후 1904년 시작된 러일전쟁 중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면서 러일전쟁은 일본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러일전쟁이 끝난 뒤인 1905년 체결된 제2차 한일협약에 따라 한반도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러일의정서에 의해 러시아와의 이야기를 붙여 일본은 일본과 동격인 대한제국의 건국을 도왔음에도 고종이 러시아 이권을 끌어들이게 된다.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외교권 회복을 호소하기 위해 고종이 1907년 헤이그 국제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현재 행해지고 있는 고자 외교와 같은 일을 당시에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했을 러시아가 배신하고 참가국 모두에게 거절당했고 고종이 보낸 밀사는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반대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관할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장이 되었다.
[주요 밀사 활동]
회의 의장을 맡고 있는 러시아 제국 주석 대표 네리도프 백작을 방문하지만 면회를 거절당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의 각국 대표를 방문하지만 지원을 거부당한다.
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 외무부 장관에게 면회를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의 회의는 일본의 한반도 관할권을 인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애초 민비암살이나 춘생문 사건을 거쳐 국가원수인 고송이 1896년 하필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망명했다(노관파천).이 시점에서 세계로부터 조선은 자주독립국가로 이미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일본덕분에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조선은 주권을 포기한 것이다 .
망명지에서 원격통치 같은 것을 하려 해도 이미 러시아의 연금 상태여서 차례차례 러시아는 한반도의 이권을 챙기게 됐다.고종이 조선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건국한 후에도 러시아는 한반도 이권을 계속 챙겼고,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러일전쟁이다.
이씨조선은 청나라에 울음을 터뜨려 청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겼고, 로관파천으로 러시아 이권에 침식되어 러일전쟁에 이르게 됩니다.외교권을 박탈당한 것에 불복하여 밀사를 보낸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입니다.그 후 일본은 한반도의 독립을 포기하게 됩니다.
민비암살의 진실은 한국의 주장과는 사뭇 다르다.일본인 중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POINT 일본 외교관 미우라 공사등 관계자 48명은 일본에서 재판을 받아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 군법회의에 회부된 장교 8명도 전원 무죄 방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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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중국 동북부에 펼쳐진 조선족 지역 - 국경 개념이 명확해진 것은 청일전쟁 이후
광역에 분포하는 조선족
요동반도는 삼국간섭의 대상으로
북부는 농업에 적합하지 않았다
일본명을 원했던 조선인
오족협화를 목표로 한 만주국
한일정부간 합의필
조선족(조선어족)이란 중국의 지린성, 헤이룽장성,랴오닝 성 등에 산재해 있다.이유는 간단했고 역사적으로 조선족은 이 일대에 살았기 때문이다.만리장성 바깥에 있는 지역으로 엄격한 국경 개념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 소수민족으로서 조선족이 한복을 입고 연출을 했던 것은 기억에 새롭다.
고구려 시대 조선족의 거주지역은 요동반도에 이르고 있다.청일전쟁 강화 때 일본은 요동반도 영유를 주장했다.그것은 요동반도가 조선 땅이라는 생각과 중국에 대한 전략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베이징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것에 위기감을 가진 프랑스, 독일, 러의 3국 간섭으로 인해 이를 포기하게 되었다.
이때 비로소 조선의 영토, 국경이라는 개념이 생겼다고도 할 수 있다.일제 강점기 조선 북부는 농업에 적합하지 않고 공업을 중심으로 개발되었다.조선 남부는 농업 주체로 하고 있다.
북부 농민들은 만주 지역에 농지를 찾아 이주를 한다.만주는 비도 내려 조선 북부보다는 농사짓기에 적합했다.이 근처는 만주족이 지주로 존재하고 있어 많은 트러블이 빈발했어.
그래서 북부 조선인들은 일본 이름을 무척 탐냈다.왜냐하면 일본 이름을 대면 만주인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후 유조호 사건을 거쳐 만주국 건국이 된다.만주국의 건국 이념은 일본인·한인·조선인·만주인·몽고인의 오족협화이다.
이로써 조선인들은 박해를 받지 않고 안전이 확보되었고 농지는 대폭 확대되었습니다.만주국과 조선족의 거주지역을 비교하면 대체로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빼앗았다는 새빨간 거짓말-이씨 조선은 자립적 국가가 아니었다.
국내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조선왕조
한일병합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이 없어지면서 남북으로 분열
현재도 계속되는 분열체질
이씨 조선 말기 조선왕조는 국내를 통치할 힘이 없었음이 분명하다.임오군란을 누가 거두었는가 하면 원세개이다.동학당의 난을 억누르기 위해 민비는 누구에게 의지했을까.이것도 청나라다.이로써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청일전쟁 이후 독립국이 된 후에는 어떨까.다음은 친러파와 친일파의 분열이다.이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순송은 칙유로 국내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일본 천황 폐하에게 나라를 맡기고 싶다고 적고 있다.일본과 한반도는 조약에 의해 병합된 것이다.일본군이 쳐들어왔다지만 그런 사실은 전혀 없다.한반도가 당시 자율적인 국가였다는 근거는 무엇일까.애초 자율적인 국가였다면 청일전쟁도 러일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마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패전 이후 한반도는 어떻게 됐을까.무려 남북으로 분열된 것이다.일제가 떠났다고 하면서 친러, 친중세력과 친미세력에 의해 나라가 분열된 것이다.
현재의 한국을 볼 때 어떻게 될까.이 역시 친중파와 친미파의 분열 구도다.더구나 문재인지난 정권에서는 적국인 북한과 중국 주도의 통일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외교정책을 폈던 것이다.역사를 통해 한반도는 이는 일본인의 시선으로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한반도가 안정적이었던 것은 일제 강점기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는 근대화에 필요한 기술이 아무것도 없었다.반수가 노비였던 나라
한반도에는 바퀴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이사벨라바드의 조선기행
자력 근대화는 꿈의 별따기
화폐경제가 없었던 조선
아무일도 없었던 한반도
너무 판타지한 역사교육
1805년 유학자 정동요는 한반도에는 없었던 것으로서 양, 바퀴,바늘이라고 한다.바퀴는 나무를 변형해 가공하는 기술.바늘은 금속의 정밀 가공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이씨 조선시대 수공업은 전혀 발전하지 않고 전승도 되지 않아 중세 이전의 상태였습니다.
1894년부터 1897년까지 3년간 4차례 한반도를 여행한 이사벨라바드는 서울로 가는 길은 소가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가늘고 미로 같았다며 식별 가능한 정도의 통로일 뿐이라고 썼다.
가로 두 바퀴 차량이 없었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나무를 구부릴 기술이 없으니 통도 없었다.
한국은 일본이 수탈한 수탈했다고 하지만 수탈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산업혁명은 공업용 기계를 제작하고 증기기관의 동력을 활용해 대량으로 상품을 제조한다.그리고 제품 판매에는 유통이 필요하다. 원자재나 상품을 운반하는 차, 원래 길이 있어야 한다.작업 공정의 전달이나 기록하기 위해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이씨조선에서는 양반 외 80%가 글을 읽지 못했다고 한다.
화폐 경제가 없으면 아무 거래도 할 수 없다.그리고 국민의 절반이 노비이다.유동적인 노동력이 없다면 누가 새로운 공장에서 일할 수 있을까.노비는 주인에게 노속되어 땅에 묶여 있던 . 즉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이 없었다.
당시 조선반도에는 산업혁명이나 근대화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없었다 .일본은 한일 병합기에 한반도에 산업기계, 자동차, 도로, 학교교육, 화폐경제, 신분제도 철폐 등을 도입했다.그로 인해 대량생산, 광역유통, 화폐와 상품의 교환경제, 유동적인 노동력을 창출하였다.그것이 한반도의 산업혁명과 근대화가 된다.
현재 한국은 모두 한국인이 만들고 일제강점기는 모든 것을 빼앗긴 암흑의 시대라고 교육받고 있다.역사인식이 다르기는커녕 정반대다.
바퀴를 만들지 못하고 어떻게 공업용 기계를 만들 수 있을까요?당시 산업기계는 증기기관의 동력을 큰 톱니바퀴가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을 덮고, 역대 조선왕조는 속국화 - 대륙반도에서 본 일본의 위상이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
건국부터 중국의 속국
이후에도 계속 중국의 침공을 받는 조선
이민족 지배를 받아온 중국과 조선
북방민족에서 역사를 보다
일본통치만을 규탄하는 한국
한반도는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 대륙이 완전히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 로 되어 있어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지만 그뿐만이 아니다.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보고 싶다.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고고학상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부터라고 한다.
전설상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며 위씨조선도 중국 연나라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는 .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는다.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되 건국 직후 후당의 책봉하에 놓이게 된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된다.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이란 만주 지역에 있던 민족으로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 왕조를 연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볼 때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인지되었고, 그 민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 관계상 정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의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역사상 대부분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다.
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나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고 지배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위의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나 당나라나 원나라나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볼 때도 이민족 국가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소규모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 대륙 지배를 거쳐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흐름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중국의 주변 민족 속으로 분류되는 .지리적으로 표현하면 북이에 대해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동이라고 불린다.중국, 한반도에 공통된 주변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병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과도 공통되는 이민족 국가에 지배된 셈이다.그것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동안 1000년 넘게 중국에 지배돼 온 것에는 불평하지 않고 일본의 35년만 1000년을 원망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똑같이 피지배지역의 역사였다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지금도 중국 한반도의 공통적인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피해자 의식은 역사적으로 배양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본을 더 끌어보면 중국 대륙도 침략받아 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의연하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임오군란에서 갑신정변,청일전쟁까지의 한반도 변화 - 천진조약 위반이 청일개전의 원인
민비는 일본형 개혁론자였다
청나라에 구제를 요구함으로써 책봉 정책이 명문화
갑신정변을 지원한 일본
러시아에 다가가는 민비
청나라가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은 조약 위반
나라를 버리고 망명한 국가원수
청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반도
민비는 당초 일본형 개화정책을 주장했었다.일본에서 사관병급 인사를 여럿 초빙해 군사교육을 하고 있다.이에 대한 반발로 인한 대원군 측의 폭동이 1882년 일어난 임오군란이다.이에 당황한 민비는 청나라에 접근하고 민비의 요청에 응한 청나라는 대원군을 붙잡아 연금하고 민비정권을 지원하여 폭동을 진압 한다.
이로써 청나라에 의한 한반도의 책봉정책이 명문화되게 된 . 거기서 중국지향의 개화정책을 취하게 된 민비와 일본형의 개화정책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분열하게 된다.
일본형 개화정책을 주장한 것이 김옥균이다.그리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다.이는 3일 천하로 불리는 김옥균 등 개화파가 일으킨 민비 타도의 쿠데타지만 다시 청나라의 힘에 의해 실패로 끝난다.
이때 갑신정변을 지원하던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국지전이 벌어진다.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도 청일은 계속 눈싸움을 하고 톈진조약을 맺음으로써 긴장이 완화된다.
조약 내용은 청일 양국 모두 한반도에서 철수한다.다음에 한반도에 출병할 때는 사전 통고한다."는 것이었다.즉, 다음에 어느 한쪽이 출병하면 전쟁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던 .
일본과 청나라는 편리하게 한반도에 사용되었으나 일촉즉발의 상태를 일시 회피합니다.
일본과 청나라가 철수한 후에, 민비는 무려 러시아에 가까워지는 .러시아와 손잡으면 일본과 청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민비는 당초는 일본, 다음에 청, 그리고 청일이 철수하면 러시아가 붙는, 3다리 외교를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던 중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한다.폭동을 진압할 수 없다고 생각한 민비는 무려 다시 청에 파병을 의뢰한 것이다.
당연히 일본에는 사전 통지가 오고, 톈진 조약 파기를 바탕으로 일본도 출병하게 된다.이것이 청일전쟁의 발단이 된다.그리고 톈진조약 뒤편에서 민비가 러시아와 내통한 것이 러시아의 한반도 남하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1895년 민비는 암살당하고(을미사변), 1896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하여 망명을 시도하고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노관파천). 그리고 조선의 원격 통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경복궁으로 돌아온 뒤 대한제국을 건국하는 것도 러시아와 계속 통한다.이로써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추진되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한국의 양다리 정책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당시는 중일러라는 대국에 3다리 외교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종합하면 한반도는 문명개화가 되지 않아 어느 나라의 지원으로 성장하고자 일본형 개화정책을 폈으나 내홍이 터지자 곧바로 청나라에 울음을 터뜨려 개화는커녕 책봉하가 되고 말았다.
청일전쟁은 바로 국내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청나라에 울부짖은 데서 비롯된다.그리고 다음으로 러시아에 접근해 한반도로 러시아를 끌어들임으로써 러일전쟁으로 발전했다.
주체성 없는 외교를 펼치며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발단 중 하나가 한반도입니다.그것을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