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자 외교 - 밀사는 왜 무시당했지?주권을 포기한 조선을 세계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
2021-06-23
카테고리:이씨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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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전 대한제국 건국
국가원수가 도망쳐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하는 실수를 벌인 고종은 제1차 러일의정서(고촌 베버협정), 제2차 러일의정서(산현 로바노프협정)가 체결되고 그 전제 아래 경운궁으로 돌아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제국의 이름을 국호에 붙이는 것은 일본 중국과 동격이라는 뜻이었으나 일본은 이를 승인했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돕고 결국 외교권을 박탈
이후 1904년 시작된 러일전쟁 중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면서 러일전쟁은 일본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러일전쟁이 끝난 뒤인 1905년 체결된 제2차 한일협약에 따라 한반도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러일의정서에 의해 러시아와의 이야기를 붙여 일본은 일본과 동격인 대한제국의 건국을 도왔음에도 고종이 러시아 이권을 끌어들이게 된다.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게 되는 것이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한심한 외교 실패
그 외교권 회복을 호소하기 위해 고종이 1907년 헤이그 국제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현재 행해지고 있는 고자 외교와 같은 일을 당시에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했을 러시아가 배신하고 참가국 모두에게 거절당했고 고종이 보낸 밀사는 #ylow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ylow #.반대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관할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장이 되었다.
[주요 밀사 활동]
회의 의장을 맡고 있는 러시아 제국 주석 대표 네리도프 백작을 방문하지만 면회를 거절당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의 각국 대표를 방문하지만 지원을 거부당한다.
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 외무부 장관에게 면회를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MEMO 네덜란드 헤이그에서의 회의는 일본의 한반도 관할권을 인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아울러 읽고 싶다
노관파천으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다 - 주권을 포기했는데 일본에 빼앗겼다고 한다
독립국이 되었는데 포기한 한반도
국가원수가 타국 공사관으로 도망치다
국제적으로 주권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 한반도
국가원수 망명하면 끝.이것이 국제 상식
고종에게 기회를 준 일본
로관파천은 조선왕조가 주권을 포기한 사건이다.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조선이 독립국가가 된 지 불과 1년 만이다.이범진·이학균 등에 의한 춘생문 사건이 발생.고종을 빼앗아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내통으로 실패하였다.
여기에 미러공사관이 관여한 사실이 뒤늦게 발각되지만 궁녀가 일본이 국왕을 폐위하려 하니 매우 위험하다는 서장을 고종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사실상의 연금 상태가 된다.공사관으로부터의 원격 통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며 대원군파 숙청 등을 지시하고 있다.그 밖에 집정을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기간에 러시아, 미국 등은 한반도 내의 이권을 차례로 챙겨갔다.
조선왕조는 국가원수가 나라에서 도망치는 실수를 벌여 이미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조선왕조는 주권국가가 아니게 된 것으로 국제사회에서는 인지되고 있다.
이후 제1차 러일의정서(小村·ウェーーバーー協定書), 제2차 러일의정서(山縣·로바노프 협정)가 체결되었고, 그 전제에서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제국의 이름을 국호에 붙이는 것은 일본이나 중국과 동격이라는 의미를 포함하지만 일본은 이를 승인하고 있다.
이는 러일전쟁 전날 밤의 사건으로 러시아가 한반도 이권을 챙기는 움직임이 가속화됐다.그리고 가쓰라·태프트 협정은 러일전쟁 후에 대해 미국과의 교통정리를 실시한 것이 된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주장하기 위해 밀사를 보냈고, 회의장에조차 들어가지 못해 국제적으로 부정당한 사건이 된다.
한일병합으로대한제국을일본이강권적으로병합한것처럼한국은말하지만그전에국가로서의체를이루지않았습니다
기억에 새로운 것은 아프가니스탄이다.아슈라프 가니는 대통령으로서 국외로 도피 망명한 셈인데, 어느 나라가 그 후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 정부를 정당한 정부로 인정했을까.
그 순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제압했다.
한반도의 경우 고종이 다시 집정을 하는 것이 허용되어 일제의 보호 아래 대한제국을 건국한 것이다.그리고 역시 국가로서의 체통을 이루지 못하고 한일병합으로 가는 것이다.
헤이그 밀사 사건 이전에 이미 주권 포기
애초 민비암살이나 춘생문 사건을 거쳐 국가원수인 고송이 1896년 하필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망명했다(노관파천).이 시점에서 세계로부터 조선은 자주독립국가로 이미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gren #일본덕분에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조선은 주권을 포기한 것이다 #/gren #.
러시아 이권의 남하가 러일전쟁의 원인
망명지에서 원격통치 같은 것을 하려 해도 이미 러시아의 연금 상태여서 차례차례 러시아는 한반도의 이권을 챙기게 됐다.고종이 조선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건국한 후에도 러시아는 한반도 이권을 계속 챙겼고,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러일전쟁이다.
POINT 이씨조선은 청나라에 울음을 터뜨려 청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겼고, 로관파천으로 러시아 이권에 침식되어 러일전쟁에 이르게 됩니다.외교권을 박탈당한 것에 불복하여 밀사를 보낸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입니다.그 후 일본은 한반도의 독립을 포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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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민비암살 범인은 누구야?한국의 주장은 사뭇 다르다.일본인 중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민비 남편 고종은 암살범을 알고 있었다
아들 순종은 암살범을 목격
지위를 박탈하고 평민으로 처리
한국의 무근거 역사인식
여러 궁녀 중 유일하게 살해된 민비
몇 안 되는 민비의 얼굴을 아는 인간
고종은 1906년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알현하면서 내 부하 중 범인이 있었다 라고 말했고,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민비 암살사건 혐의로 특사된 조희연 우범선 이두황 이범호 권희진 등 6명에 대해 왕비를 살해한 장본인이라며 처형을 칙명했다.
살해 현장에 있던 순종은 우범선이 국모의 원수임을 목격했다고 보고했고, 또 우범선 자신도 자신이 민비를 살해했다고 자백 한 바 있다.
우범선은 순종이 쏜 것으로 알려진 자객 고영근과 노윤명에 의해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1903년(메이지 36년) 11월 24일 암살된다.
조선에서는 민비 암살 이틀 뒤(10월 10일) 민비의 사망이 일반에 공표되기 전에 대원군이 민비 왕후의 지위를 박탈하고 평민에게 떨어뜨리는 조칙이 공포된다.이때 민비의 사망은 아직 공표되지 않았다.
즉, 국내적으로는 평민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정부는 조선 국내에서 행한 재판에서 흥선대원군의 주모로 하는 판결 를 내렸다.
사건은 대원군이 주모한 암살사건으로 처리되었습니다.그리고 민비는 평민으로서 사망을 공표당합니다.
한국인들이 믿고 있는 일본인이 민비 암살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왕비를 끌어내 두세 곳에 베인 상처를 입히고 나체로 웃으며 또 화를 내면서 왕비의 국부를 꼼꼼히 검사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민비를 살해했다는 얘기다.
참고로 그 근거가 되는 자료의 제시는 평소와 같이 없다.위안부의 이야기나 군함도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선정적인 이야기로 바꾸어 상대방이 충격을 받는 동안 근거 없는 이야기로 바꾸어 결론짓는다.
남편 고종의 부하가 아들 순종이나 여러 인간 앞에서 이런 짓을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민비암살 시 궁중에는 100명 정도의 궁녀, 하녀가 있었고 민비 1명만이 살해되었다. 민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누구 하나 틀리지 않고 민비를 암살하고 있는 것이다.
민비와 접견할 수 있는 인간은 한정된다.게다가 암살을 마치고 범인들은 곧바로 도망치고 있다.국부에 기름을 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참고로 현재 민비로 추정되는 사진은 민비가 아니라는 학설은 1910년까지의 일본이나 유럽 자료에서는 정장 한국의 부인 궁중의 시녀 궁녀로 소개된 것으로 이 사진을 민비이라고 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밝히고 있다.그렇게 민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민비암살의 진실은 한국의 주장과는 사뭇 다르다.일본인 중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일본 외교관 미우라 공사등 관계자 48명은 일본에서 재판을 받아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 군법회의에 회부된 장교 8명도 전원 무죄 방면되었습니다.
노비 비율이 인구의 40%에 이른 이씨조선 한일 병합은 2,000년 지속된 노비 제도를 폐지했다
2,000년 지속된 노비제도
노비 양산을 요구한 양반
노비 줄이기 정책에 반대한 양반
갑오개혁과 한일병합으로 노비제도는 폐지
일본 통치를 도대체 누가 원망했을까
한국 학계에서는 이씨 조선시대 인구를 1,000만명 정도로 봤을 때대략 40%에 해당 하는 400만 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695년 서원경(현재의 청주 부근)의 4개 촌락을 조사한 문서에서는 460명의 인구 중 28명이 노비로 삼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비율로는 6% 남짓이 된다.
조선 개국 직전인 1391년 이성계가 받은 봉토에서도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그곳에 사는 162명 중 노비는 약 4.3%인 7명에 불과했다.이것이 100년 후에는 인구의 40%에도 불어난다.
고려 시대에는 부모 중 한 명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되어 노비와 양반 양자의 결혼 자체가 불법이었다. 노비만의 상속이었기 때문에 크게 증가하지는 않았다.
일본에서는 율령제도의 종식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시기로서는 10세기 초순입니다.
이씨 조선시대에 이르러 고려시대 제도는 점차 느슨해져 양반으로서는 노비끼리 결혼시킬 것이 아니라 노비와 양자를 결혼시키는 것이 노비를 늘릴 수 있다 하여 적극적으로 양자와 노비의 혼인을 권유하였다.양반은 거의 무급의 노비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부를 늘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비는 병역이나 납세의무를 지지 않는 때문에 국가로서는 노비가 늘어난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래서 조선의 일부 왕들은 노비의 수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폈다.
태종은 양인(노비 이외의 계층)의 남성과 여성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두 양인 자격을 부여하도록 했다.당시 양반 중에서는 여성 노비를 첩으로 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는 노비를 줄이고 입양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노비가 줄자 양반 관료들이 반발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여성 노비들이 멋대로 양인 남성에게 시집가 인륜을 어지럽힌다'는 구실을 앞세워 폐지를 요구했다.
1485년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에서는 부모 한쪽이 노비라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 하였다. 조선의 노비 수는 다시 급증하게 된다.
울산부, 단성 등 일부 지역에서는 노비 비율이 인구의 50?60%에 육박했고 1663년에는 한성부 호적에서 73%로 기록됐다.
양반은 사복을 채우기 위해 노비를 양산하고, 나라는 더 이상 노비가 늘어나면 국익으로서의 세수가 줄어드는 줄다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조선 내에서 양반의 세력은 막강하여 국왕이라 할지라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결과적으로는 1885년 갑오개혁에 따라 명목상 노비제도는 폐지된다.갑오개혁이란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가 독립국이 되기 위해 일본이 요구한 여러 개혁이다.
결국 1910년 한일병합 이후 호적제도 정비와 창씨개명으로 호적상 신분기재를 폐지하고 제도적 노비제도는 종식되게 된다.
일제강점기 근대화로 한반도에 유사 이래 2,000년 계속된 노비제도는 종식되고 40%나 되는 노비가 해방된다.
여기서 큰 의문이 생긴다.국민의 절반 가까이는 노비로부터 해방되어 일반인으로서의 권리를 얻게 되어 문화적 생활을 하게 되었다.그 사람들이 일본 통치를 원망할까.「자신이나 가족이나 장래의 자손을, 노비의 인생으로부터 해방시킨 일본을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양반은 분명히 노비를 혹사하여 사복을 채울 권리를 빼앗겼다.그러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그때까지 노비였던 사람들과 같은 계급이 된 것이다.항일운동이란 일본으로부터 권리를 빼앗기고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한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한반도를 일본은 식민지화했다고 한국은 말하지만, 일본은 40%나 되는 노비를 해방시켰습니다.한반도를 식민지로 한 것은 조선의 특권계급이었던 양반입니다.
이씨 조선시대의 경제 화폐경제 도입한 것은 일본 대한제국 중앙은행은 일본 제일은행
조선반도에서는 화폐경제가 발전하지 않았다
통화를 양산하고 반복되는 인플레이션
화폐경제가 없으면 자본주의는 없다
차관도입과 일본은행이 세관을 주관한다
지난 두 차례 외환위기도 일본이 구제
이씨 조선 초기에는 전매품 소금과 천과 쌀, 잡곡으로 한정된 교환이었다.이후 삼베·면포·쌀 등을 현물 화폐로 거래되었다.1401년 저화를 발행하여 통용을 장려하였으나 보급되지 못하였다.
1423년에는 조선통보라는 동전, 1464년에는 전폐가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국가의 수세에 사용될 목적으로 쓰이지 일반 사회에 유통되는 것이 아니었다.1678년 상평통보를 주조하였다.
이 화폐는 약 2세기에 걸쳐 발행되었지만 각 관청에서 주조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1866년 대원군은 재정 살리기와 경복궁 개축을 위해 당백전을 주조하였다.
재정을 살리기는커녕 양산하는 바람에 화폐 가치는 폭락해 1868년 통용이 금지됐다.1883년에는 당오전을 발행해도 화폐가치는 곧바로 급락해 1895년 통용이 금지됐다.1892년부터 백동화를 발행하였는데, 금본위 체제에서 보조화폐로 사용되었다.
즉 한반도 경제는 물물교환이 기본이다.노비 매매도 노비 5명과 소 1마리와 교환되고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한반도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시켰다.세관은 일본의 제일은행에 귀속되어 관세 징수를 일본 화폐로 실시했다.화폐정리사업의 자금은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으로 이루어졌으며, 일본의 제일은행이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이 되었다.
화폐경제가 없다면 자본주의 경제는 있을 수 없다.한반도의 근대화 및 화폐 경제, 자본의 유통 등 시장 정비를 일본이 실시하였다.지금도 한국이 국외와 거래할 때 외상구매금 신용장은 일본 사은행이 발행하고 있다.이 신용장이 없으면 한국 기업은 국제 거래를 할 수 없다.
1997년, 2008년 한국의 외환위기 때도 일본은 구제에 나섰다.한국 경제의 근간인 통화 자체가 일본이 신용을 주고 있는 것이다.이씨 조선시대처럼 무작정 통화를 발행해 괴멸적인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10년 동안 두 번이나 외환위기를 맞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원화는 여전히 취약하다.이것이 한반도의 현재에 이르는 통화의 역사이다.
임오군란에서 갑신정변,청일전쟁까지의 한반도 변화 - 천진조약 위반이 청일개전의 원인
민비는 일본형 개혁론자였다
청나라에 구제를 요구함으로써 책봉 정책이 명문화
갑신정변을 지원한 일본
러시아에 다가가는 민비
청나라가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은 조약 위반
나라를 버리고 망명한 국가원수
청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반도
민비는 당초 일본형 개화정책을 주장했었다.일본에서 사관병급 인사를 여럿 초빙해 군사교육을 하고 있다.이에 대한 반발로 인한 대원군 측의 폭동이 1882년 일어난 임오군란이다.이에 당황한 민비는 청나라에 접근하고 민비의 요청에 응한 청나라는 대원군을 붙잡아 연금하고 민비정권을 지원하여 폭동을 진압 한다.
이로써 청나라에 의한 한반도의 책봉정책이 명문화되게 된 . 거기서 중국지향의 개화정책을 취하게 된 민비와 일본형의 개화정책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분열하게 된다.
일본형 개화정책을 주장한 것이 김옥균이다.그리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다.이는 3일 천하로 불리는 김옥균 등 개화파가 일으킨 민비 타도의 쿠데타지만 다시 청나라의 힘에 의해 실패로 끝난다.
이때 갑신정변을 지원하던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국지전이 벌어진다.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도 청일은 계속 눈싸움을 하고 톈진조약을 맺음으로써 긴장이 완화된다.
조약 내용은 청일 양국 모두 한반도에서 철수한다.다음에 한반도에 출병할 때는 사전 통고한다."는 것이었다.즉, 다음에 어느 한쪽이 출병하면 전쟁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던 .
일본과 청나라는 편리하게 한반도에 사용되었으나 일촉즉발의 상태를 일시 회피합니다.
일본과 청나라가 철수한 후에, 민비는 무려 러시아에 가까워지는 .러시아와 손잡으면 일본과 청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민비는 당초는 일본, 다음에 청, 그리고 청일이 철수하면 러시아가 붙는, 3다리 외교를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던 중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한다.폭동을 진압할 수 없다고 생각한 민비는 무려 다시 청에 파병을 의뢰한 것이다.
당연히 일본에는 사전 통지가 오고, 톈진 조약 파기를 바탕으로 일본도 출병하게 된다.이것이 청일전쟁의 발단이 된다.그리고 톈진조약 뒤편에서 민비가 러시아와 내통한 것이 러시아의 한반도 남하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1895년 민비는 암살당하고(을미사변), 1896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하여 망명을 시도하고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노관파천). 그리고 조선의 원격 통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경복궁으로 돌아온 뒤 대한제국을 건국하는 것도 러시아와 계속 통한다.이로써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추진되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한국의 양다리 정책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당시는 중일러라는 대국에 3다리 외교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종합하면 한반도는 문명개화가 되지 않아 어느 나라의 지원으로 성장하고자 일본형 개화정책을 폈으나 내홍이 터지자 곧바로 청나라에 울음을 터뜨려 개화는커녕 책봉하가 되고 말았다.
청일전쟁은 바로 국내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청나라에 울부짖은 데서 비롯된다.그리고 다음으로 러시아에 접근해 한반도로 러시아를 끌어들임으로써 러일전쟁으로 발전했다.
주체성 없는 외교를 펼치며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발단 중 하나가 한반도입니다.그것을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미국 윌리엄 그리피스가 쓴 이씨조선 일제강점기 이전의 한반도가 보입니다.
서울로 호송된 네덜란드인 일행은 마치 구경거리의 야수 같았다.하얀 얼굴과 붉은 수염을 가진 이 외국인을 보러 군중이 몰려들었다.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잘 보이는 곳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모두가 네덜란드인이 물건을 마시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서양인들은 술을 마실 때 코를 귀보다 위로 잡아 올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사람에 비유되며 왕은 그 머리, 귀족은 몸통, 인민은 발이다.가슴과 배는 부풀어 오르는 반면 머리와 하지는 말라 있다.귀족은 그 강욕으로 인민의 생혈을 헹굴 뿐만 아니라 왕의 대권도 침범하고 있다. 나라는 충혈을 일으키고 관료주의의 부종을 앓고 있다. .
고문의 풍부함은 조선이 아직도 반문명국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법원과 감옥의 발명품으로는 쇠사슬, 등을 치기 위한 대나무, 엉덩이를 치기 위한 패들 모양의 기구, 살이 터질 때까지 종아리를 치기 위한 채찍, 고기와 내장을 괴롭히기 위한 밧줄, 손으로 쥐어주기, 지팡이, 그리고 무릎과 건넌방망이를 치기 위한 판 등이 있다.
결혼 후에는 여자와의 접촉이 불가능하다.여자는 거의 항상 안방에 틀어박혀 용서를 받지 않고 집 밖을 내다볼 수조차 없다.격리가 너무 엄격해서 외부인의 손가락이 닿았다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딸을, 남편은 아내를 죽이고 아내는 자살할 수 있다 .
조선의 건축은 극히 원시적인 상태에 있다.성곽, 요새, 사찰, 수도원 및 공공건축은 일본이나 중국의 장려함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이 나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데 석조 유적이 거의 없다.주거지는 기와집이나 초가집으로 거의 예외 없이 단층집이다.소도시에서는 규칙적인 대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곳곳에 산재해 있다.대도시나 수도에서도 거리는 좁고 구불구불하다.
조선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문맹이다.아마 농민 계급의 남자 열 명 중 네 명이 중국어나 조선어를 읽을 수 있겠지만 여자도 계산에 넣으면 약 85%의 사람들은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다만 지역차는 크다.
조선에는 사무라이가 없다.일본에서 조선에 부족한 것은 심신이 잘 단련되고 병사인 동시에 학자이며 충성심과 애국심과 자기희생의 높은 이상을 내세우는 문화적 집단이다.
당시 한반도를 전한 저서는 여러 편이지만 내용은 공통적으로 양반의 횡포, 관료부패, 문화가 미개함을 전하고 있습니다.한국에서 전해지는 이씨조선만이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