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영웅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 병합을 했다는 거짓 교육.
2020-08-01
카테고리:한일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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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는 한일 병합을 한 인물?
한국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정한론자였다고 완강히 믿고 있습니다.그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저는 이토가 한국통감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토가 한일 병합론자였다고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시종 한일 병합에는 반대 입장이었습니다.
중대한 착오를 범했다고 발언한 안중근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얼굴도 모른 채 암살을 저지릅니다.이토(伊藤)는 더 이상 총리대신도 총감도 아닙니다.그리고 안중근은 옥중에서 자신이 중대한 착오를 저질렀다고 발언합니다.
아울러 읽고 싶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 수수께끼 - 안중근의 배후에 누가 있었나?발견되지 않은 블로닝 총의 총탄.
암살 전 한일병합은 각의결정
7발 장전된 총에서 13발이 발사?
기병총 탄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러시아는 이토의 방문을 환영
러일의 혼란은 로마노프의 실수?
사라예보 사건에서도 사용된 총
공통점은 2점밖에 없다
이토의 얼굴을 몰랐던 안중근
이토의 눈앞까지 홀로 다가온 이유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한일 병합을 앞당겼다는 얘기를 듣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이유는 1901년에 이토는 러시아 이권의 남하를 책임지고 총리대신직을 사임한 바 있다.가쓰라 내각에서 한일병합에 대한 방침을 밝힌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 단행 방침 및 대한시설 대강령'의 각의 결정은 암살 전인 7월로 되어 있다.이에 따라 7월 이토(伊藤)는 한국통감을 은퇴했다.이토(伊藤)의 암살은 같은 해 10월 26일이다.
안중근의 브로닝 총탄은 이토의 체내에서 발견되지 않았다.사건으로 인해 발포된 총탄은 13발.피탄자는 다음과 같다.
이토 히로부미 3발, 무로다 요시후미 5발, 나카무라 고레코 2발, 모리 타이지로 1발, 카와카미토시히코 1발, 다나카 신지로 1발.
브로닝 총은 7발 장전된 총이다.이토(伊藤)의 체내에서는 프랑스제 기병총 2탄이 발견되어 1발은 관통하고 있었다.안중근이 이토를 잘못 쳤을 때 작전을 보완하기 위해 하얼핑역 지붕, 2층 부분 등에서 저격하고 있다.왜 2층 부분이냐면 사법해부에 의한 탄도를 봐도 오른쪽 어깨에서 배꼽을 향해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
안중근에 의한 충동적 단독범이 아니라면 주모자는 누구냐는 얘기다.
일본 내부의 정치항쟁이 원인이라는 설은 서두의 이유에서 있을 수 없다.일본 내에서는 정치적 매듭도 절차도 이미 붙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토의 방문을 환영한다.
러시아설은 러시아의 이점으로 볼 때 생각하기 어렵다.이토(伊藤)의 목적은 러시아의 복권을 돕기 위한 무역협정을 맺는 것이었다고 한다.꼬꼬꼬댁을 만나러 하얼핀에 갔고 꼬꼬댁도 대환영했다.
애초 러일개전을 목적으로 한다면 정치적 실권이 없는 이토를 암살하는 것은 빗나간 일이다.그리고 러일전쟁이 끝난 지 불과 4년 만에 다시 개전 등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얘기다.
레닌설이라는 게 있어.논거는 다음과 같다.레닌은 로마노프의 추문을 긁어 모으고 있었다.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는 레닌에게 큰 계기가 됐다.로마노프 왕조의 대실수로 러시아 국내에 대량의 전단을 살포하고 있다.
제1차 대전의 계기가 된 오스트리아 대공 암살(사라예보 사건)에도 브로닝 총이 사용됐다.브로닝 총은 러시아 육군이 채용하는 총이다.그리고 레닌은 브로닝총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
이 설에서의 공통점은 브로닝총과 로마노프의 범행으로 가장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코민테른의 전략은 스스로 싸우지 않고 사회를 선동하는 것이 상투수단이기도 하다.다른 나라끼리 전쟁을 시키는 것도 포함된다.
러일전쟁 종결이 1905년, 이토 암살이 1909년, 사라예보 사건이 1914년이다.그리고 러시아 혁명은 1917년.제1차 세계대전 중 혁명을 완수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대해 주모자는 수수께끼 속이다.다른 각도에서 보면 현장에 남은 것은 안중근과 브로닝총뿐이었다.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모른다. 진술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자서전에도 분명히 그 자신이 쓰고 있다.암살은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그 장소에는 이토 이외에도 동행한 일본인도 여럿 있었고 러시아인도 있었다.애초부터 기병총을 든 저격수들은 준비를 했고 예정대로 사격을 했다 .
안중근이 이토의 눈앞까지 갈 필요성은 있었을까.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안중근에게 주변의 주의를 끌고 멀리서 저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현장에는 안중근과 브로닝 총만 남게 된다.
이미 화해한 유족과 용서하지 않는 세력
1939년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박문사에서 이토의 공양을 올리고 조선호텔에서 이토의 아들 이토 후미요시를 면회하여 사과를 하고 화해하였다.이를 용서하지 못한 김구는 장제스에게 상하이에 살던 안준생에게 조작 혐의를 씌워 처형해 달라고 부탁한다.이것은 즉, 어떻게 된 것일까.
알려지고 싶지 않은 진실 조작시킨 거짓말
안중근은 영웅이어야 한다.반일 독립파 영웅으로 이용돼야 한다.이것이 독립을 지향하는 세력의 희망이었다.즉 이토 히로부미는 정한론자여야 한다는 얘기다.한국인들이 오해해서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 병합을 추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렇게 조작된 것이다.
진실은 어둠에 묻힌 채
이토가 병합에는 반대였다는 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조차 몰랐다는 점, 암살은 중대한 착오였다고 안중근이 말한 점, 유족들이 이미 화해한 사실 등은 국내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
안중근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는 영원히 정한론자인 것이다.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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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이토 히로부미 암살총의 수수께끼, 브로닝총의 장전수를 넘은 탄환은 어디서 발사되었는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사살되었습니다.이토(伊藤)는 한국병합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이었습니다.이토는 청일전쟁강화조약(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에서 한반도의 독립을 명기하고 청나라에 이를 약속하게 했습니다.
총리직은 1901년 퇴임.한국통감도 퇴임하고 마지막 직책은 추밀원 의장입니다.공교롭게도 그의 죽음으로 한일 병합론이 우세하여 이듬해인 1910년 8월 29일 병합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반도 독립론자였습니다.암살당했을 당시의 직책은 추밀원 의장이었습니다.
안중근이 사용한 권총은 벨기에제 브로닝 총으로 7발 장전입니다.이토(伊藤)가 총에 맞은 것은 3발.그 총알은 브로닝 총이 아니래요.1발은 어깨에서 다리로 관통하여 이토(伊藤)의 위쪽 각도에서 발사된 것입니다.브로닝 총 탄환은 다른 피탄자의 체내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발견된 총알의 수는 총 13발입니다.기병총 탄환도 발견되었습니다.이토(伊藤)는 저격병에 의해 사살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안중근은 이토를 쏘지 않았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몰랐습니다.증언에서도 분명하며 안중근의 자서전에도 분명하게 적혀 있습니다.그는 그룹에 다가가 이토(伊藤)로 추정되는 남자를 쏘았고 예정대로 체포되어 단독범으로서의 증언을 했습니다.7발 장전 총에서 13발을 발사하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안중근 단독범으로 사건은 처리되었지만 상황으로 보아 복수의 공범자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원망한 것은 양반 노비에서 해방된 한반도인들은 자유를 구가했다 평범하게 생각하고 일본을 원망한 것은 양반이죠.인구의 절반이나 되는 노비를 풀어준 일본을 노비가 원망할까요? 양반들은 원망하죠.어느 날 갑자기 같은 신분이 되었다니까.
노비가 말했습니다.나는 평생 노비의 삶을 원했는데 개방해!일본이 미워!!
종전 후 양반이 정치에 복귀하고 나서 계속 이 상태인 거죠.조선시대 미화와 일제시대 부정이죠.
국민들이 일본을 좋게 말하면 용서할 수 없죠.
신해혁명을 지탱한 일본 중국 건국은 일본 유학 중이던 쑨원이 달성한 것 쑨원은 청일전쟁이 끝난 뒤 광저우에서 무장봉기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1897년 미야자키 도도텐의 소개로 두야마 미쓰루와 만났고, 두산을 통해 히라오카 코타로로부터 도쿄에서의 활동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았다.또 주거지인 와세다의 2천㎡ 저택은 이누요타케시가 주선했다.1902년에 일본인 오쓰키 카오루(大月薫)와 결혼했다.
오랫동안 만주민족의 식민지로 여겨졌던 한민족의 손문은 독립하고 싶다, 辮발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같은 해 미야자키 도도텐 등의 원조로 중국 동맹회를 결성. 여기서 도쿄에 유학중인 장제스와 만난다.
1911년 10월 10일 공진회와 동 학회의 지도하에 무장봉기가 일어나 각 성이 이에 호응하여 독립을 호소하는 신해혁명으로 발전하였다.
현재도 베이징 상하이 우한 난징 다롄 홍콩 등에 쑨원의 일본 이름인 중산을 딴 중산공원이 있다.길 이름에도 중산로라는 것도 많아 손문이 일본인 아내를 둔 것은 중국인은 누구나 알고 있다.사실 나는 중국에 갔을 때 처음 중국인에게 들었어.
미야자키 유텐은 김옥균과도 교류가 있어 일본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를 심화시켰다.김옥균의 암살로 한반도는 자력 근대화의 길을 끊게 되었다.
파리국제회의장서 제출된 인종차별철폐법안 세계최초 일본 제안 1919년 일본은 파리에서 세계 최초로 국제회의장에서 인종차별 철폐를 제안했다.참가국들은 깜짝 놀랐다.그런 발상이 없었기 때문이다.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국제적 위상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1920년 발족하는 국제연맹에서는 상임이사국이 된다.
그 전 단계 회의장에서 무슨 말을 꺼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일본의 설득에 의해, 앞으로 한 걸음에 가결이라고 할 때에 미국의 맹반발을 받아, 가결에는 이르지 못했다.미국은 노예제도보다 우위에 있는 경제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은 아시아 각국의 식민지 현황을 우려해 그 비판을 통해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다.대동아공영권 구상이란 무엇인가.그것은 아시아 개방과 백인 지배의 배척이었다.
일본은 쑨원의 중화민국 건국을 돕고 김옥균을 지원했다.김옥균의 삼화주의는 일본 조선 중국이 불가침의 독립을 유지하고 국력을 높여 백인 지배와 맞선다는 생각이다.
그 밖에도 아시아 각국에서 일본으로 유학 온 장래의 지도자들이 있었다.일본은 아낌없이 근대화의 혜택을 전했다.청일전쟁에서의 한반도 독립도 마찬가지다.이토 히로부미는 한국통감 퇴임 때까지 한반도 독립론이었고 병합 전년까지 유지되었다.
한반도 이외의 아시아 국가들은 이러한 것들을 잘 알고 있다.그래서 현재까지도 친일이다.대만에서 종군한 사람들은 지금도 아시아 개방 싸움에 참가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어떤 전쟁도 옳은 것은 아니지만 싸우는 데는 이유가 있다.패배하더라도 그 이유야말로 중요하다.미일의 시각에서는 정반대일 것이고 한국의 시각도 다를 것이다.아시아 시점에서 보면 많은 것들이 보인다.
두 번째는 1943년 대동아회의 기념사진
일본 : 도조 히데키
중화민국: 왕조밍
만주국: 장경혜
필리핀 공화국: 호세 라우렐
버마 국가: 바 모우
태국 왕국 : 원 와이타야콘
인도: 찬드라 보스
이승만과는 도대체 누구인가 - 일본통치시대를 일절 모르는 반일초대대통령 - 3.1독립운동과도 관련없음.
이승만은 친일 개화파?
독립문은 어디로부터 독립했을 때의 것일까
일제강점기를 모르는 이승만
미국 괴뢰정권으로 출범한 반일정부
일본에서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보면 신기한 점이 많다.조사해 보니 서재필의 독립협회 설립 멤버이기도 했던 것 같다.서재필이라고 하면 청일전쟁 이후 서울 독립문을 만든 중심인물이며,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일으킨 즉 친일 개화파이다.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해 후쿠자와 유키치 등과 친분을 쌓았고 상하이에서 민비로 향하던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독립문은 일본으로부터 독립된 문으로 바뀌었을까.독립문은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가 독립한 것을 기뻐하여 서재필 및 독립협회가 설립한 것이지만 지금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문이라고 한국인들은 완강히 믿고 있다.
1897년 고종의 퇴위 요구 전단 살포를 실시하여 투옥되었으며 1904년 출옥 후 1919년까지 미국에서 살았고, 3.1독립운동에도 관여하지 않았다.3.1운동의 기운을 받아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설립했든 파벌항쟁에서 실각한 지 불과 1년 만에 하와이로 이주해 있다.즉 1904년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미국에 살면서, 즉 일본 통치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이승만의 전후 한반도 통치는 바로 미국 시각의 통치였다고 볼 수 있다.그것은 한일 병합부터 한반도의 근대화 등에 대해서는 전혀 빈칸으로 되어 있다.그는 러일전쟁조차도 미국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그의 정책은 GHQ의 정책과 연결되어 있었고 미국 내에서의 반일 감정과도 완전히 연결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어쨌든이승만 시대에 반일 구조의 토대는 구축되었고 현재에 이른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